2025년 4월호 마루대문 65년이 지난 뜨거운 함성, 지금의 시국을 돌아보다

2025.04.1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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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이 지난 뜨거운 함성,

지금의 시국을 돌아보다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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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대선’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지며 어지러운 시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65년 전 3월과 4월 역시 뜨거웠다. 독재정권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던 학생들부터 결국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을 하야까지 시킨 민주주의의 한 획이 그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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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월의 불꽃>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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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기록물 자료(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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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도화선이 된 학생시위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면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이다. 장기집권을 하고자 했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들은 많았으나 4·19혁명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대구의 2·28학생운동과 마산의 3·15의거였다.


대구의 시위는 3월 15일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선거 유세가 있던 2월 28일 일요일에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키면서 이에 반발해 나타났다. 경북고부터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등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시위에 참여한 12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당하기도 했다.


대구 학생들의 2월 28일 시위 이후로 고등학생들은 ‘학원의 자유’와 ‘학생의 정치 도구화’를 주요 문제로 삼았으며 점차 ‘부정선거 규탄’으로 진행됐다. 이에 정부는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했지만 학생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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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경무대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경찰



이러한 가운데 마산에서도 3·15의거가 발생했다.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준비 과정부터 노골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다양한 곳에서 부정선거에 반발한 시위들이 발생했음에도 자유당 정권은 3월 15일 선거 당일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온갖 부정행위를 진행했다.


이런 부정행위는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95%로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 단독 후보에 나왔던 이승만은 85%(963만표), 부통령 후보 이기붕 73%(833만표)의 결과로 나왔다. 사실이것도 이기붕의 표가 100% 가까운 득표가 나오자 하향 조정한 결과였다.


당시 마산에서는 허윤수의 변절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허윤수는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나와 마산 시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3·15 선거를 2달 앞두고 갑자기 민주당 탈당 후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에 자유당의 부정행위를 목도한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은 선거 당일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최루탄 및 총기를 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민주정치를 위한 시위였지만 정부는 공산당이 배후에 있는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하면서 마산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러한 마산의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터트린 것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었다. 당시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김주열은 마산상고(현재 마산용마고)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마산상고 합격자 발표는 3월 14일이었으나 선거로 인해 이틀 뒤인 16일로 연기됐고 김주열은 형과 함께 마산에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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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묘비



그러나 마산에서는 3월 15일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발생했고 김주열은 규탄 시위에 참가한 후 행방불명이 됐다. 실종 27일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이를 목격한 수많은 마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진행되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더욱 모여들었고 이들은 파출소 및 관공서 등에 불을 지르는 등 강력한 항의를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 2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위는 마산뿐만이 아닌 부산, 경남 일대로 번져 나갔다.


4월 11일에 발생한 시위에서부터 시민들은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부정선거 배격하자”  “공명선거 보장하라” 등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학원 탄압에 항의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점차 책임자인 이승만의 하야를 향한 목소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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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경무대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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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경찰의 진압장면



대통령 하야까지 이끌다

마산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고등학생 중심의 학생시위가 다시 생겨났다. 4월 12일 진주, 15일 마산, 16일 청주 등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났고 18일에는 부산과 청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4월 개강을 맞이한 대학가 역시 반정부시위의 분위기가 점차 짙어졌다.


4월 4일 전북대 학생들을 시작으로 13일 마산 해인대(현경남대)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했으며 서울에서도 18일 시위가 발생했다. 고려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4·18 선언문>을 낭독한 후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등의 플래카드와 함께 시위가 진행됐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평화시위로 진행됐던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는 학교로 다시 돌아가던 상황에서 반전을 맞이했다.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을 향해 정치깡패들이 덮쳤고 이 피습이 다음 날 신문보도가 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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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중앙청 앞의 시위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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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에서 물러나오는 이승만 대통령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와 정치깡패 테러 소식을 들은 인근 대학생 역시 거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대학생들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을 필두로 중앙청으로 향했다. 하지만 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대는 흥분하면서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등 격화되어갔다. 이들은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 등을 외치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고 정부는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4월 19일의 시위에서 1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400명이 넘는 부상자도 나타나면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후 장면 부통령이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사퇴했고 3월 15일 부정선거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도 사퇴를 발표했다. 이승만 역시 자유당총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음에도 시민들이 요구했던 재선거나 대통령 사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에 4월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 교수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일반 군중들까지 더해지면서 야간까지 진행됐고 학생들도 거리로 다시 나오게 됐다. 결국 이승만은 하야의 뜻을 직접 밝힌 후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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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월의 불꽃> 스틸컷



4·19혁명 최초의 영화 개봉

뜨거웠던 1960년 3월과 4월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4월의 불꽃>이 지난달 27일 개봉했다. 제65주년을 맞아 개봉된 이번 영화는 김주열 열사와 어머니의 가슴 아픈 이야기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시민들과 학생들의 뜨거운 항쟁의 순간을 스크린에 담았다. 4·19혁명을 다룬 최초의 영화인 이번 작품에 배우 조은숙, 조재윤 등이 출연했으며 ‘국민 아버지’로 불리는 최불암이 내레이션에 참여하면서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4월의 불꽃>의 연출은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촬영을 담당했던 촬영감독 출신 송영신 감독이 맡았다. 송 감독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며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고 전한 바 있다.


3·15의거와 4·19혁명을 다룬 <4월의 불꽃>은 마산 창동예술촌과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촬영됐으며 10억여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어느 정도의 픽션이 더해졌지만 영화는 현실을 고증하기 위해 당시 인물들의 인터뷰와 신문기사들을 보여준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지금, 결국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고민해야할 때다. 지금의 자유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져 온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조금 더 나아진 대한민국을 생각할 때 분열된 현실보다는 이제는 하나가 된 힘을 보여야 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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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월의 불꽃>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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