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호 마루대문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 대한민국 선정 그날, 한국은 세계에 묻는다 우리가 남길 유산은 무엇인가
그날, 한국은 세계에 묻는다
우리가 남길 유산은 무엇인가
글 장수경
2026년 7월, 전 세계의 시선이 한국을 향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차기 회의 개최지로 대한민국을 공식 발표했다. 세계 문화유산을 논의하는 국제무대의 중심에 한국이 선 것이다.
이번 결정은 2025년 7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 본회의에서 이뤄졌다. 내년 7월, 제48차 회의는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다. 우리나라가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이래, 세계유산위원회를 유치하는 것은 처음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1998년), 중국(2004년·2021년)에 이어 세 번째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지구촌 문화유산의 등재와 보존을 심의하는 국제 문화정책의 최고 결정기구다. 이 회의의 개최는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국제적 신뢰를 상징한다.
부산 유치는 단지 행사의 유치가 아니다. 이는 한국이 ‘보존의 대상’이 아닌, ‘보존의 방향’을 논의하는 나라로 도약했음을 보여주는 선언이다.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에서 미래로, 보호에서 책임으로 나아가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바랐던 ‘문화 강국’의 이상이, 이제 유네스코라는 세계의 언어로 실현되고 있다. 세계유산을 논하는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다.
지난 7월 1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차기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지로 대한민국이 확정되자
전 최응천 국가유산청장(가운데)을 비롯한 정부 대표단이 박수를 치고 있다.
유네스코 유치까지의 과정
한국이 이번 회의를 유치하기까지는 철저한 준비와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6월 30일 유네스코 본부에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 유치 의향서를 제출했다. 뒤이어 7월 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회의에 외교부·국회·부산광역시 관계자들이 직접 참석해 한국의 유치의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7월 15일 본회의장에서 대한민국이 차기 개최국으로 공식 발표됐다.
개최 도시는 ‘부산’으로 결정됐다. 국내 도시 가운데 후보지로 거론된 여러 곳 중, 국제회의 인프라와 도시 이미지, 문화적 다양성을 고루 갖춘 점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부산은 국제영화제, APEC 정상회의, ITU 전권회의 등 굵직한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 도시와 역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로서 세계유산 논의가 열릴 무대로 손색이 없다.
이번 유치는 단순한 지명 방식이 아닌 유네스코 내 다자외교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한국은 현재 제4기 세계유산위원국(임기 2023~2027년)으로 활동 중이며,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위원국 활동과 병행해 회의 유치까지 성공한 것은 한국의 문화외교 역량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는 방증이다.
유네스코와 세계유산 제도의 역할
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온 인류의 문화유산까지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세계는 깨달았다.
“문화유산은 더 이상 각국이 혼자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 모두가 함께 보호해야 한다.”
이런 반성과 다짐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네스코(UNESCO)다. 1945년 전쟁 직후 설립된 유네스코는 교육,과학, 문화 그리고 평화를 위한 국제협력기구다.
그리고 1972년 이 유네스코가 채택한 협약이 바로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인류 전체가 함께 지켜야 할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지정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을 약속하게 됐다.
한국은 1988년에 이 협약에 가입했다. 현재까지 협약국은 196개국에 이른다.
이 협약을 바탕으로 해마다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 문화유산 보존 정책을 결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국제회의로 자리 잡았다.
회의에서는 새롭게 등재할 유산뿐 아니라 기존 유산의 보존 상태와 위기 대응 방안도 논의된다. 필요할 경우 등재된 유산을 목록에서 삭제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전쟁, 도시 개발, 기후 위기 등 유산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유네스코의 경고나 국제사회의 권고가 각국의 실질적인 대응을 끌어내는 역할도 한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구성 유산 중 하나인 성산일출봉 천연구역(출처: 국가유산청)
수원 화성 동문 창룡문
회의에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비롯해 정부 대표, 학자, 전문가, 비정부기구(NGO) 등 약 3000명이 참석한다. 문화·역사·환경을 넘어서 지속가능성과 공동체 참여 같은 미래지향적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단순한 ‘유산 소개의 장’이 아니다. 한국이 세계 유산 논의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국제문화정책의 흐름 속에서 책임과 역할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유산의 위상과 최근 성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유산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고 있으며 세계와 소통하는 하나의 창구가 되고 있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이 처음 등재된 이후 우리나라는 현재까지 총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15건은 문화유산, 2건은 자연유산이다.
‘창덕궁’ ‘조선왕릉’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왕실 문화와 도시계획의 미를 보여주며, ‘남한산성’과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방어 체계와 정치 체제를 담은 공간이다. 자연유산으로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갯벌’이 있다. 특히 ‘한국의 갯벌’은 생물 다양성과 기후 변화 대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에서도 한국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김장문화, 판소리, 농악, 줄타기, 아리랑은 무형유산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올해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남과 북의 유산이 하루 간격으로 연이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이례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12일에는 울산 ‘반구천 암각화’가 한국의 17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13일에는 ‘금강산’이 북한의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반구천암각화’는 약 6천 년에 걸쳐 그려진 고래와 고래잡이 장면이 남겨진 유산으로, 한반도 선사인의 예술성과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금강산’은 자연 경관과 불교 신앙이 어우러진 문화경관으로, 북한의 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종묘 정전 전경
2023년 북한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가을 단풍으로 물든 10월 중순의 금강산 모습(출처: 뉴시스_조선중앙TV 캡처)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남과 북의 문화유산이 같은 회의에서 나란히 세계유산이 된 것은 유네스코 역사에서도 드문 사례다. 이는 분단의 현실을 넘어 한반도의 문화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처럼 한국은 유산을 보존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산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다자외교와 평화 담론에 기여하는 문화 강국의 위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문화외교의 무대, 부산에서 다시 묻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부산 유치는 단순한 국제행사 유치가 아니다. 한국이 문화로 세계와 소통하고 공동의 가치를 논의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문화의 힘 즉 ‘소프트파워’에 더 큰 주목을 쏟고 있다. 그 중심에 세계유산이 있다. 공존, 기억, 책임이라는 가치를 품은 유산은 국경과 이념을 넘어 인류가 함께 나누는 언어다.
이번 유치 성공은 한국의 국제적 신뢰도와 협상력, 그리고 문화외교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킨 계기다. 무대가 될 부산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한때 한국전쟁의 피란수도였던 이 도시는 이제 세계유산을 이야기하는 평화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상처의 공간이 문화의 플랫폼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은 세계사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남긴다.
한국은 이제 유산을 단지 보유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유산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책임지는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 말했던 ‘문화로 존경받는 나라’의 이상과도 연결된다. 그가 꿈꿨던 ‘높은 문화의 힘’의 나라가 지금, 유네스코 무대 위에서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 이번 회의는 한국의 유산을 소개하는 자리를 넘어 국제적 연대를 이끄는 문화외교의 장이 될 수 있다. 회의 의장국으로서 한국은 단순한 진행자가 아닌 기후위기·개발압력·전쟁 등 세계유산이 직면한 문제들에 해법을 제시하는 주체로 주목받고 있다.
인류가 후대에 남길 유산은
2026년 여름, 부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닌 하나의 질문이 된다. 유산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켜야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함께 보존하려 하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이 순간, 그 물음은 더 이상 외부의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이 된다.
부산은 그 질문을 품을 자격이 있다. 격동의 현대사를 지나며 생존과 복원의 상징이 된 이 도시는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으로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세계에 전하려 한다.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은 단지 보고서를 검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도시를 걷고, 사람을 만나며, 한국의 문화와 정신을 현장에서 체감하게 될 것이다.
국가유산청 허민 청장은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우리의 유산을 더 널리 알리고,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여야 한다”며 내년 세계유산위원회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운영 계획이 아닌 문화로 세계와 소통하겠다는 국가적 의지의 표현이다.
문화유산은 단순한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로 향하는 다리이며, 문화를 지킨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약속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 약속의 중심에 한국이 서 있다.
이번 회의는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열린다. 분단이라는 현실 위에서 다시 이어지는 문화의 대화는 세계유산이 지닌 진정한 힘과 평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우리가 남겨야 할 진정한 유산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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