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마루대문 579돌 맞은 한글날, 사람을 생각하다
579돌 맞은 한글날,
사람을 생각하다
글 백은영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문득, 방영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떠오른다. 훈민정음 반포를 앞둔 일주일, 경복궁을 뒤흔든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을 축으로 글자의 탄생을 막으려는 비밀결사 ‘밀본’과 창제와 반포를 밀어붙이는 세종의 정면 승부를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보인 것처럼, 훈민정음 창제 당시 사대부들은 새로운 문자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문자 체계는 한문에 의존했고 지배층은 이를 교양과 권력의 상징으로 독점했으며 백성은 문맹 속에 갇혀 살아갔다.
세종은 백성이 글을 몰라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현실을 민본주의적 비극으로 보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이에 대한 세종의 고뇌가 자주 드러난다. 병석에 누워서도 학자들과 토론을 이어갔고 백성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자리를 열었다.
세종은 언어가 곧 삶의 권리임을 간파했다. 그는 학문과 철학,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문자를 설계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은 훈민정음은 세종의 자주·애민·실용 정신에서 탄생한 문자인 것이다.
<훈민정음>의 첫 장

<훈민정음 언해>의 첫 장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본받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눠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이 이어(俚語, 속된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쉽고 간단하지만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이름하겠다.”
-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 25(1443)년 음력 12월 30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우리 문자이자 그 창제 원리와 사용법, 과학적 근거를 한문으로 해설한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문자인 훈민정음과 구분하기 위해 해설서에는 보통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명칭을 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과학적 구조를 뚜렷이 보여준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 ‘ㅁ’은 입술이 다물린 모양에서 출발했다. 모음은 천(·), 지(ㅡ), 인(ㅣ)의 철학을 기초로 조합됐다. 단순하면서도 체계적인 구조는 음운학적 원리와 우주론적 사유가 결합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발명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는 곧 권력의 저항을 받았다. 사대부는 이를 ‘언문’이라 낮춰 불렀고 한글 문서 사용을 금하는 조치까지 취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민중 속에서 살아남았다. 노래와 편지, 설화와 민요 속에서 이어졌고 억눌린 이들의 삶을 담아내며 뿌리내렸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은 우리의 글자를 만들어 백성을 교화하고 나아가 통치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지난 2023년 10월 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글 창제 580주년 기념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언해본 동시 최초 복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관계자가 언해본과 해례본을 펼쳐 보이고 있다. (출처: 뉴시스)
또한 한글 창제와 관련된 여러 일화 중 하나에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세종 16년에 진주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보고 가슴 아파한 세종은 무지한 백성들에게 효와 충을 가르칠 필요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이에 여러 자료를 모아 그림으로 만든 <삼강행실도>를 펴내지만 그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세종이 한글 창제를 결심하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편 영국의 유명한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은 “세상에 문자 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든 사례는 드물지만 그중에서도 이처럼 과학적이고 완결된 체계는 유례가 없다. 한글은 가장 독창적이고도 훌륭한 음성문자”라고 극찬했다.
베르너 사세(Werner Sasse) 전 한양대 석좌교수는 “한글은 한국의 전통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강조했으며, 제레드 다아이몬드(Jared Diamond)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시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는 한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소리의 원리를 문자의 구조에 체계적으로 새긴 기록이라는 점이 핵심 근거로 제시됐다.
세종의 창제는 단순한 문자의 발명을 넘어 백성들의 억압된 삶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글을 통해 인간 존엄을 실현하려는 시대적 선언이었다.
간송본과 상주본의 가치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에 간행된 1책의 목판본으로 세종이 직접 작성한 ‘예의(例義)’ 부분과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해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8명의 학자들이 만든 ‘해례(解例)’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반포됐는지 등 한글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인류 유일의 고문서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훈민정음 해례본> ‘어제훈민정음’ 편 4장에서는 ‘聲(소리 성)’과 ‘音(소
리 음)’을 구별하고, ‘자음’을 이루는 법칙에 대해 기술했다. (출처: 뉴시스)

<훈민정음 해례본> 5장에선 중성 ‘ ● , ㅗ, ㅏ, ㅜ, ㅡ, ㅓ’ 등에 대해 ‘개구
도’와 ‘입술의 오므려짐 여부’를 기준으로 차이점을 설명함. ● 는 평순이
니 제주도 방언에서의 원순음은 변음임이 입증됨. (출처: 뉴시스)
국보로 지정된 간송본 해례본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돼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40년대에 입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은밀히 지켜졌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일명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알려졌으나, 소장자라 주장하는 배익기 씨와의 소송과 공방을 거치며 공개가 중단됐다. 2019년 대법원은 상주본의 법적 소유권이 국가에 있음을 확정했지만, 배 씨는 아직까지 상주본의 정확한 소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더불어 상주본의 가치를 1조 원으로 산정하고 그 10%인 1000억 원을 받으면 국가에 넘기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불에 그을린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지난 2015년 배익기 씨
집에서 불이 나 해례본 하단이 불에 그을려 있다. (출처: 뉴시스)
한글을 지켜낸 사람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 아래 학교와 일상에서 조선어가 금지되던 때 조선어학회는 연구와 보급의 최전선을 지켰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출발해 학술발표와 강연으로 한글의 가치를 알렸고,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통해 여론의 호응을 모았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됐으며,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칭한 뒤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해 표기의 기준을 마련했다. 1942년에는 원고 2만 6000여 장이 압수되고 학자 33명이 연행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에게 내려진 판결문의 한 구절이다. 민족의 말과 글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
한글 연구의 기초를 세운 주시경 선생의 말이다. 36년의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6년 7월, 서재필·이상재·윤치호 등 개화 지식인들이 힘을 모아 ‘독립협회’를 세웠다. 이들은 자주독립과 개혁을 기치로 독립문을 건립하고,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민권과 자주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같은 해 봄인 4월 7일, 서재필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한글 전용지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신문은 1~3면을 순한글로, 마지막 면을 영문으로 꾸려 계몽과 대외 홍보를 동시에 겨냥했다. 단순한 보도지를 넘어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며 자주독립의 여론을 키운 동력이었다.


<독립신문>
잡지 <한글>. 주시경의 제자로
한국어문을 연구하고자 한 사
람들이 동인으로 참여하여 최
초로 간행한 한국 어문 연구
잡지(출처: 국립한국박물관)
서재필의 믿음은 분명했다. 독립은 구호나 과시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각성한 민중이 그 뿌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교양에 총력을 기울여 2천만이 함께 부르짖는 날 독립이 성취될 것이라 역설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글 신문을 발행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국어 연구의 개척자 주시경의 발걸음도 그 시대의 절박함을 증언한다. 을사늑약 이후 그는 우리말과 글, 더 나아가 민족의 얼이 사라지지 않도록 강연과 수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소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보따리를 들고 달려갔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제자 최현배의 회고처럼 주시경은 연지동에서 정동, 박동, 동관으로 쉼 없이 옮겨 다니며 교단에 서는 매순간 전장에선 장수처럼 뜨겁고 정성스럽게 학생을 마주했다.
그의 강의에는 말 속에 겨레의 혼이 깃들고, 말 바깥으로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유가 넘쳐흘렀다. 민중 계몽과 한글 수호에 앞장선 이들의 발걸음이 모여 근대 조선의 자주와 각성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갔다.
제578돌 한글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5회 광화문광장 휘호대회가 열리고 있다. 외국인 35명이 포함된 이번 대회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출처: 천지일보DB)
공공 문해와 세계로의 인프라
한글은 ‘쉽게 배우고 정확히 적는 문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말 소리를 거의 100% 반영해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다는 점, 자음과 모음의 형태가 뚜렷해 비슷한 글자끼리 혼동하지 않고 정확히 쓸 수 있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한글은 표음성과 표의성을 모두 가진 문자다. 즉 소리(음)를 적으면서도 의미를 유지하려는 표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뜻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읽기도 어렵지 않다. 이러한 읽기의 효율은 국가 문해력과도 맞물린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만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과학 소양 등 학업성취도를 국제적으로 비교·평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지켜왔다. 이는 ‘글자를 통해 정보를 얼마나 빨리, 정확히 처리하는가’라는 지표의 안정적 성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자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지만 한글의 규칙성이 상대적으로 교육 효과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로 작동한다는 평가다.
세계 공용(혹은 보조) 문자로서의 가능성도 현장에서 확인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부톤섬 치아치아 공동체는 모어의 기록·보존을 위해 한동안 한글을 도입했고, 2012년 행정·인력 문제로 제동이 걸렸다는 평가 이후에도 현지 학교에서 한글 표기 수업이 재가동되며 사전·교재 발간으로 모국어 기록을 이어가는 움직임이 확인된다. 이외에도 중국 지린성 연변·장백 등 조선족 자치지역에서는 한국어(한글)가 중국어와 함께 행정·교육·공공표지에 병기되고 있으며, 태국 라후와 중국 소수민족, 남미 아이마라어 등에서 한글을 기반으로 한 표기 실험이 진행된 바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적응성도 강점이다. 한글은 유니코드에 초·중·종성 자모와 완성형 음절이 모두 안정적으로 등재돼 있어(자모 조합으로 임의 음절 생성 가능) 검색·음성합성·OCR·입력기 등 언어기술 전 주기에 이식성이 높다. 문자 블록 단위로 끊어 읽고 쓰는 구조는 작은 화면에서도 가독성과 레이아웃 안정성을 보장한다.
학계·저널리즘의 평가는 오랜 기간 일관된다. 디스커버(Discover)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라 부르며 합리성과 규칙성을 강조했고, 여러 언어학 텍스트는 한글을 ‘기능이 원리와 직접 호응하는 표기 체계(featural alphabet)’로 소개한다. 이는 ‘배움의 속도’와 ‘오표기의 감소’라는 실용 이득으로 환산된다.
무엇보다 한글은 ‘공공성’을 품은 글자다. 외래어·소수언어·특수교육 현장에서 한글의 음가 투명성은 발음 유도, 보완적 표기(보조 문자)로의 응용, 저비용 학습 도구화 같은 접근성 혁신을 가능케 한다. 이는 문자를 통해 정보 접근권을 넓히는 길, 곧 문해의 민주화를 실천하는 것과도 맞물린다.
올해로 한글날이 579돌을 맞았다. 우리의 말과 글에는 우리의 얼이 녹아 있다. 세종의 애민정신에서 탄생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우리는 진정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쯤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말과 글은 사장되기도 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소통과 이해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세종의 그 마음을 닮아, 우리의 말과 글을 보다 신중하고 아름답게 사용한다면 이는 또한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첫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세종대왕 동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출처: 천지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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