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호 마루대문 “어흥~ 검은 호랑이가 왔어요”

2022.01.3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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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흥~ 검은 호랑이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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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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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가 밝았다. 여느 해가 그렇듯이 새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희망을 갖는다. 특히 2020년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의 전쟁에 지친 이들에게 2022년 새해의 소망은 더욱 간절하다. 한편 임(壬)이라는 한자가 가진 ‘검다’는 의미는 방위상으로는 북(北)을 가리키고 오행으로는 수(水)를 말하고 있으며, 힘이 넘친다는 뜻이 있어 활기차고 유연한 한해가 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이 많다.


무엇보다 옛 사람들은 검은 호랑이가 마귀를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니, 올 한해가 몹시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 동물이기도 했다. 단순히 동물이라기보다 영물(靈物)로 여겨지기도 했던 호랑이다.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아 우리 민족과 얽힌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두려움의 대상 호랑이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해 ‘호랑이의 나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호랑이의 보호색이 드넓은 초원보다는 산이 많고 수목이 우거진 우리나라에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호랑이가 많은 만큼 호랑이로 인한 피해도 컸다. 호랑이에 의해 사람이나 가축이 해를 입는 환난을 일컫는 ‘호환(虎患)’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이들이 밤에 시끄럽게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말도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885(헌강왕 11)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 마당으로까지 뛰어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1604년경에는 호랑이가 창덕궁에 출몰해 사람을 해쳐서 선조가 포획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1638년 2월에는 호랑이가 무리를 지어 성벽을 타고 넘어와 사람들과 가축을 해쳤다는 기록도 있다. 원래 호랑이는 단독 생활을 하는데 이처럼 무리를 지어 도성 안에까지 활개를 치고 다닌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환이 심해 한 달 안에 죽은 자가 120여 명이었다거나, 호랑이 피해가 날로 늘어나 농민들이 마음 놓고 출입을 하지 못한다는 등 호랑이 피해와 포획에 관련된 기록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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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민화 권정순의 <까치호랑이> (해외문화홍보원) / (우) <맹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외에도 전래동화나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 호랑이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보통 맹수로서의 호랑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만 은혜를 갚거나, 효심이 있는 영특한 동물로도 등장한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도 단군신화일 것이다. 인간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동굴 속에서 버텨야 하지만, 호랑이는 그 야성을 순화시키지 못하고 동굴 속에서 뛰쳐나오게 되고 곰은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호랑이를 야성의 맹수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본능은 나아가 호랑이를 신성시하거나 경외시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았다.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고 제사까지 지내는 풍속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호랑이는 신통력을 지닌 영물로서 외경과 신앙의 상징이 됐으며, 집과 무덤을 사악한 잡귀로부터 지켜주는 벽사의 동물이 됐다. 한편 민화, 생활용품, 장식품 등에서 만나는 호랑이는 곰방대를 물고 있는 등 익살스러우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
다.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만 봐도 친근한 모습의 호랑이를 떠올릴 수 있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심벌마크도 호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군자·영물의 상징
호랑이는 위엄을 갖춘 군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주역>에는 호랑이가 몸을 감추고 털갈이를 한후 변신한 모습을 대인군자가 뛰어나고 훌륭한 면모를 이룬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18세기에는 호랑이가 산을 나서는 장면을 묘사한 ‘출산호(出山虎)’ 그림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중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90.4㎝×43.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죽하맹호도(91.0㎝×34.0㎝, 개인 소장)>와 작자 미상의 <맹호도(96.0㎝×5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유명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민화에는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유명하며, 이때 호랑이의 모습은 상당히 해학적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한편 호랑이를 숭상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후한서> 동이전에는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 서로 간섭할 수 없다. (중략)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으로 보아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풍속은 원시부족국가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鎭山)에서 도당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호랑이숭배사상은 산악숭배사상과 융합돼 산신신앙으로 자리 잡게된다. 호랑이를 산군·산군자(山君子)·산령(山靈)·산신령(山神靈)·산중영웅(山中英雄)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이유다.

산신을 모셔놓는 산신당에는 호랑이가 산신의 사자로 묘사되기도 하고,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또한 산신도 속 호랑이는 포효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인자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호랑이를 인간을 도와주는 착한 짐승으로 나타낸 것이다.

호랑이가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신통함이 있다고 믿어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을 비롯해 민가에서도 호랑이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여 삿된 것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동국세시기>에 “민간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는 풍속이다.

호랑이, 군자·영물로도 여겨져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시기도해
민화에서는 해학적으로 그려



좋은 일을 하고도 비난을 받거나 화를 입게 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중에 “호랑이 잡고 볼기 맞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호랑이를 잡으면 우환이 생긴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관아에서 가짜로 볼기를 치는 시늉을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호랑이를 질병 퇴치용으로 삼기도 했는데, 학질에 걸린 사람의 웃통을 벗겨 호랑이 ‘호(虎)’자를 쓴 글을 붙이면 학질이 놀라서 달아난다는 미신이 있고,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시집가는 가마 위에 호피를 덮기도 했다. 여우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을 휘젓는 것을 호랑이를 이용해 미리 몰아내는 의미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호랑이 가죽은 비쌌기 때문에 담요에 호랑이 그림을 그려 덮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백두산호랑이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 같은 앞다리, 동아 같은 뒷발로 양 귀찢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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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수렵(1904년). 일제강점기 일본은 해수구제사업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수많은 동물들을 포획, 사살

했다. 그중 대표적인 동물이 영물로 여겨졌던 호랑이다. 사진은 일본군 의무대 막사 앞에서 호랑이 가죽을 벗기기 전에 촬영한 것이다.

죽은 후에도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이 남아있으며, 이마에 임금 왕(王)자 무늬가 선명하다. 도톰한 앞발에는 강인함이 묻어난다.




지난해 많은 사랑을 받은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에 표현된 호랑이의 모습이다. 호랑이의 특징을 잘 나타낸 가사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라고도 불리는 한국호랑이는 육중한 체구, 둥근 머리, 작고 동그란 귀가 특징이다. 앞발과 어깨의 근육이 매우 발달해 힘도 세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몸전체 길이가 390㎝에 이른다. 등 쪽에 노란빛을 띤 갈색 털이 나고 24개의 검은 가로줄무늬가 있다. 배 쪽은 흰색이며 등 쪽보다 연한 빛깔의 가로줄무늬가 있다. 꼬리는 몸통의 반 정도 길이로서 연노랑빛을 띤 갈색이며 8줄의 검은 고리무늬가 있다.


한국호랑이는 중국의 동북호랑이(만주호랑이)나 시베리아호랑이에 비해 다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 동북아시아 일대의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가장 용맹하기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데 1915~1942년 일제강점기에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는 이유로 대규모 남획이 이뤄진 것도 주요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일제의 호랑이 남획은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총기를 이용한 사냥이 민간에까지 보급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남한에서는 1921년 경북 경주시 대덕산에서 사살된 것이 백두산호랑이의 마지막 공식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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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제왕으로 불리는 수리부엉이는 몸길이가 약 70㎝에 

이르고 날개를 편 길이가 약 190㎝에 이르러 올빼미 종류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리부엉이를 잡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일본군의 모습이다. 

호랑이는 잡아 가죽을 벗기고 수리부엉이는 

박제해 장식용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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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해방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 나란히 나부끼는 모습에서도 광복을 실감할 수 있다.




허울 좋은 해수구제사업

우리 민족에게 있어 호랑이는 두려움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었다. 삿된 기운을 쫓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고 믿었고, 산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영물이었다. 비록 사람을 해치고 가축을 잡아먹어 피해가 유독 많았던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군제를 운영해 국가적으로 호랑이를 잡아들이긴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 우리가 잡았을 때의 말이다. 여기에서 착호는 ‘범을 잡는다’는 뜻이고 갑사는 ‘갑옷을 입은 병사’를 말한다. 무관급의 착호갑사는 초기 20명에서 시작해 1485년에는 44명까지 늘어났으며 가장 많을 때는 1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착호갑사도 민간 사냥꾼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삿된 기운 쫓는 벽사의 기능

호환 막기 위해 착호갑사 두기도

사살된 호랑이 일부는 일본으로


이렇듯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백성의 안전을 위해 오랜 기간 호랑이 사냥을 장려한 것과 전국 300여 고을에 매년 호랑이 가죽을 진상품으로 올리도록 하는 등의 이유로 한반도에서는 이미 호랑이 개체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라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해수구제사업이다. 신식 무기로 조직적인 군대까지 동원된 호랑이 말살정책이었다. 말이 좋아 해수구제사업이지 우리 민족의 얼과 사상, 문화와 풍속 등을 말살시키려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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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완전독립’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차에 달고 행진하며 해방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당시 전국적으로 맹수들의 소탕작전이 이뤄졌는데 일본 헌병 3300여 명, 조선 사냥꾼 2300여 명, 몰이꾼으로 민간인 9만여 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조선통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부터 23년 동안 포획된 표범의 수는 624마리, 호랑이는 97마리라고 한다. 이렇게 사살된 호랑이 중 일부는 일본으로 보내졌으며,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는 호랑이 고기 시식회가 열리기도 했다. 비록 맹수로 분류된 동물들이기는 하지만 호랑이를 비롯해 표범, 늑대 등은 우리 조상들과 더불어 살던 동물들이었다. 일본은 독도 강치, 동경이, 삽살개와 같은 동물들도 사냥하거나 학살했는데, 우리나라 토견 중 하나인 ‘동경이’는 꼬리가 없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이 신성시 여기는 조각상 ‘고마이누’도 꼬리가 없었는데 그와 닮은 개가 식민지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것이 특징인 삽살개는 일본군의 방한복을 제작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약 50만 마리가 학살당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이자 씻을 수 없는 고통이다. 주권을 잃은 나라의 국민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으며 나라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한반도에 서식하며 우리 민족과 함께 생활했던 동물들까지 말살하려 했다. 사람의 목숨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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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랜드에서 공개한 한국호랑이 오둥이의 모습(뉴시스)
 



암흑과도 같았던 36년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이 왔다. 빛이 돌아온 것이다. 광복의 소식은 일본에 머물던 우리 동포들에게까지 전해졌고, 거리로 달려 나와 광복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고이 간직해두었던 태극기를 맘껏, 한껏 흔들 수 있었다. 자유를 다시 찾은 날이었다.


한편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기 몇 달 전인 2021년 6월, 멸종위기에 처한 한국호랑이 새끼 5마리(수컷 2마리, 암컷 3마리)가 자연번식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호랑이는 보통 한번에 2~3마리만 출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번에 5마리가 한꺼번에 태어난 것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 이들 호랑이의 이름은 아름, 다운, 우리, 나라, 강산이다.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가 이들의 기운을 받아 ‘아름다운’ 한해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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