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호 역사 인류의 이동과 어업을 위한 고대 배의 역사 Ⅲ

2024.04.2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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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이동과 어업을 위한

고대 배의 역사 Ⅲ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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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롱쉽 항해 모습(출처: 덴마크 바이킹 박물관)




바이킹(Vikings)은 스칸디나비아로부터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 북유럽과 중앙유럽까지 항해하며 교역하거나 또는 해적으로 활동한 북게르만족 노르드인으로서 바닷사람을 가리켜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바이킹이 활동한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한다. 노르드인들의 군사적 상업적 성장과 인구 팽창은 중세 스칸디나비아뿐만 아니라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섬, 프랑스, 키예프 루스, 시칠리아 등 광범한 지역에 중요한 요소로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용도의 바이킹 선박들이 노르웨이, 덴마크의 해저에서 발굴되어 오슬로와 로스킬레 박물관에 보존·전시되고 있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바이킹 배는 아마도 ‘롱쉽(longship)’일 것이다. 롱쉽은 군사 및 탐험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끔 속도와 민첩함에 맞춰졌으며, 항해를 보완할 노를 갖추어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항해가 가능하게 하였다. 롱쉽은 얕은 물에서 상륙과 병력 배치를 유용하게 하는 기다랗고 좁은 선체와 낮은 흘수*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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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오솔로 바이킹 배(출처: Oslo’s Viking Ship Museum)



바이킹들은 보통 평화로운 용도로 사용되는, 많은 독특한 형태의 선박들을 만들었다. 크노르는 대규모의 많은 화물들을 실을 수 있도록 고안된 상업용 선박으로 용도의 배이며, 넓은 선체와 깊은 흘수, 적은 수의 노들을 갖췄다. 바이킹들의 혁신 중 하나는 ‘베이타스’라고 하는 돛에 단 원재로 역풍에서도 효과적으로 항해를 하게끔 해주었다.


바이킹이 사용한 배는 한쪽에 최대 10개의 노와 가로돛 하나를 갖춘 작은 갤리선으로 50~60명을 태울 수 있었다. 비잔티움, 베네치아, 제노바 및 그 외 중세 해양 강대국들은 훨씬 더 정교한 갤리선을 만들었다.


롱쉽으로 대표되는 진보한 항해 기술로 인하여 본거지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바이킹의 활동이 미친 적도 있었다. 바다와 강을 통한 탐험과 식민의 시기가 지난 뒤 바이킹들은 북서유럽, 동유럽, 북대서양 도서, 멀리는 북아메리카 북동해안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동안 노르드 문화가 다른 지역에 폭넓게 보급됨은 물론 역으로 외래문화도 스칸디나비아에 영향을 미쳤다. 13세기까지 이탈리아 갤리선들은 플랑드르 지역과 영국, 나아가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했다.



* 흘수(draft, 吃水)

선박이 물 위에 떠 있을 때에 선체가 가라앉는 깊이 즉, 선체의 맨 밑에서 수면까지의 수직 거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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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갤리선(출처: Navy Encyclopedia)



그리스, 로마, 카르타고 등의 해양강국이 주요 활동 무대인 지중해는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으로 둘러싸인 내해에 가까운지라 바람의 방향이 변덕스럽다. 이러한 바다의 바람 때문에 사각돛 배는 경쟁력이 떨어졌고, 그래서 새로 개발된 갤리선이 라틴 돛 즉 삼각돛 배인 드로몬(dromon)이었다. 삼각돛을 단 배는 역풍에서도 지그재그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각돛 배에 비해서 훨씬 안정적인 항해가 가능했다. 그러나 순풍에서 사각돛 배만한 속도가 나오지 않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 이 삼각돛과 사각돛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복합돛 배가 개발되었고 복합 돛단배 중에서 ‘카락(Carrack)’이 대표적인 갤리선이다. 그러나 약 1500년경을 기점으로 갤리선은 서서히 쇠퇴하게 된다. 갤리선은 노라는 보조 동력이 있어 항해 시일을 맞추는 데 비교적 유리했지만 범선에 비해서 필요 인원이 너무 많이 요구되고 순수 범선에 비해서 화물의 최대 적재량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상선이란 측면에서는 경쟁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갤리선은 주로 전투선으로 전환되었다. 13세기까지 이탈리아 갤리선들은 플랑드르 지역과 영국, 나아가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했다.

 

갤리선의 최전성기는 십자군 전쟁과 그 이후인 14세기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대형갤리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배는 길이가 35m가 넘고 양쪽에 각각 30개 이상의 노 젓는 자리가 있었으며 속도가 아주 빨랐고 기동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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