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역사 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Ⅴ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화가 배운성

2024.08.15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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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Ⅴ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과 화가 배운성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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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줄다리기>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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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자화상>



주인 아들 몸종으로 따라간 유학

호남의 5만석꾼으로 낙원동 저택에 살며, 성북동 길상사 자리를 별장으로 갖고 있었던 백인기는 아들 백명곤(白命坤)을 일본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유학 보내면서 혼자 보내지 않았다. 몸종을 딸려 보냈다. 똘똘한 몸종이 아들 수발을 들며 몸종도 같이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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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주인 아들 백명곤의 몸종으로 해외 유학에 동행하게 된 배운성(裵雲星)은 백명곤과 같은 또래였다. 배운성은 1900년 7월 13일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1908년 인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하고 경성중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며 밤에 야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가난한 집안의 똑똑한 그 아이를 낙원동 5만석꾼 부호 백인기 집에서 거두어 집안일을 거들며 공부하게 했다. (그때가 1905년이라고 되어 있는 자료들은 1915년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배운성은 백인기의 도움을 받아 사립 중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배운성은 주인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1919년 일본으로 유학 갈 때 몸종으로 함께 일본으로 갔다. 배운성은 주인 아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되자 경제학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1922년 백명곤이 다시 독일로 유학 가게 되자 배운성도 동행했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도착하여 박물관에 들렀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럽 명화를 접했다. 이 박물관 관람이 배운성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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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예술 종합대학



“그 아담한 박물관의 분위기가 나의 본능 속에 깊이 잠복하고 있던 예술 의욕을 자극해 (중략) 그때까지도 경제학 전공을 목적했던 나는 급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화가로 전환했다. 나는 내 일생에 있어 영구히 마르세유의 하루를 잊지 못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

주인의 아들 백명곤은 유학 3년 만에 건강 문제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몸종으로 따라간 배운성의 여비는 보내주지 않아 여비가 없었던 그는 유럽에 남았다. 그는 고학으로 유화를 공부하여 1923년에 레빈풍크미술학교에 그리고 1925년에는 베를린 국립미술종합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베를린 미술종합대학 학창 시절이던 1927년 프랑스의 대표적 가을 전시회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서 목판화 <자화상>으로 입선하였다.


1930년 베를린 미술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여 연구원 과정 학비를 면제받고, 기숙사와 화실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운성은 돈 걱정 없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되자 학교에 남아 작품을 제작하며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베를린 쿠틀리트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를 계기로 독일 문화원 미술분과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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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가족도(140×200㎝ 캔버스에 유채)> (출처: 웅갤러리)



1933년 바르샤바 국제미전 1등상, 1935년 함부르크 민속미술박물관 개인전, 1936년 프라하 개인전을 열며 입지를 다졌다. 배운성은 여러 전시회에 유화, 수채화, 목판화, 수묵화를 출품하였다. 특히 그는 유화뿐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34년 프라하에서 열린 국제 목판화 전람회에서 <초상화>, 1936년 바르샤바의 제2회 세계목판화전에서도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의 그림은 동양의 모필(毛筆)을 사용한 부드러운 표현 효과와 유연한 색상 조화 그리고 한국의 풍습과 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 테마로 유럽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1937년 배운성은 독일 여성과 결혼하고, 그해 10월 예술의 도시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살롱드 메, 르 살롱, 살롱 도톤느 등 유명한 화랑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세계 3대 화랑인 파리 샤르팡티에화랑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 유럽 화단의 인정을 받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고희동을 친다. 고희동은 1909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그 후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등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대부분은 일본을 통해 서양 미술을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배운성은 유럽에 유학하여 유럽에서 서양미술을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배운성이 유럽에서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며 큰 상을 탈 때마다 식민지하 조선의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였다. 다음은 배운성의 활약을 보도한 국내 언론 기사들이다.


● 조선 화가 걸작 전 구주 경이, 「와르소」 국제미전에 배운성 화백 수위, 23국 233명의 7백 점 중, 동방 전통의 특성 발휘 (동아일보, 1933. 11. 27)

● 배운성씨 판화가 백림에서 전람회 개최(동아일보, 1935. 4. 5)

● 화가 배운성씨 「프라그」에서 개인전(동아일보, 1936. 1. 28.)

● 천재 화가 배운성씨 (사해공론, 1936. 1)

● 화백 배운성씨 「파리 춘전」에 입선 3대 회장 개인전(동아일보, 1938. 6. 21)

● 세계에 빛나는 우리 명장: 동양화적 독특한 선미로 구주화단에 대격동 「샤르팡티예」화랑에서 개인전도 개최 東線西色(동선서색)의 권위 배운성씨 (동아일보, 1939. 1. 8)

● 배운성씨의 「쌀롱」 작품을 파리박물관에 진열, 「왈소우」의 국제미전서도 수상 (동아일보, 1939. 2. 9) 등등


배운성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딴 손기정, 민족 무용의 세계적 스타 최승희와 함께 일제하 국내 우리 민족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1938년 딸이 태어났다. 이듬해인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었다. 배운성은 파리 함락 직전 가족과 그림 167점을 남겨두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는 두고두고 “그림을 가져와야 한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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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 나치군(1940년 6월 14일)



성공한 화가로 조국에 돌아와서

1940년 서울로 돌아온 뒤 을지로에 운성회화연구소라는 화실을 운영하였다. 돌아온 조국은 침략전쟁의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중일전쟁 중이었다. 예술가들도 전쟁 선전에 동원되었다. 배운성은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선전을 위한 무용극 <부여회상곡>의 무대미술과 의상을 담당하였다. 친일미술가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 참여하였으며, 징병제 실시를 선전하는 신문 삽화를 그렸다. 전쟁 의식 강화를 위한 <결전미술전람회>에도 출품했다. 이렇게 친일 전쟁 부역활동에 끌려다녀야 했다.


1944년 전쟁의 막바지 시국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같은 해 이종우, 김환기, 이쾌대 등과 <유채화 10인전>에 참여하였다.


해방, 분단, 좌우의 이념대립 속에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홍문대학관(弘文大學館)이라는 학교가 설립되어 1949년 4년제 홍익대학으로 개편되면서 미술과를 설치했다. 배운성은 초대 학과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서양화부 추천 작가 및 심사 위원으로 참가하면서 유화 <성호(聖號)>를 출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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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의 판화 <아동공원(36×26㎝, 1967)>



좌우 이념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였다. 배운성은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배운성이 재혼한 부인 이정수가 공산주의자여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2020년 자하문로에 있는 웅갤러리에서 <배운성 展(전) 1900~1987: 근대를 열다> 특별전을 열었던 최우철 한국화랑협회 회장이자 웅갤러리 대표는 “배운성의 아내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했는데 남로당에서 문화부장 비서 정도의 직위를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아시아경제>, 2020.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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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화가의 아내(1938, 60x73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웅갤러리)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급증하는 좌익사상자들을 통제하고 전향시키기 위해 19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 창설했다.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에는 문화실이었는데, 문학박사 양주동(梁柱東)을 책임자로 하여 산하에 문학부·음악부·영화부·연극부·미술부·무용부·이론연구부 등 전문부서가 있었다. 배운성은 좌익 미술인인 이쾌대, 정현웅, 정종여, 최재덕 등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3일 만에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을 제외하고 한강 이남의 전국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소집·연행되었다.


수만 명에서 약 20만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배운성은 적군 치하 서울에서 서울미술제작소 판화부를 담당하다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북한에서

북한에서 배운성은 평양미술대학 출판화 강좌 상급교원을 지냈다. 공산주의 정치성이 강한 〈원쑤를 반드시 갚으리라(1953)〉 등과 같은 판화, 유화, 수채화 작품을 발표했다. 1957년 이후에는 국립미술출판사 소속 화가로, 1959년 이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현역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월북 때 부상이 계속 재발해 작품활동은 활발하게 하지 못했다. 독일에 있던 옛 독일인 친구들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주을온천 등으로 요양을 다녔다 한다.


1963년 북한당국은 배운성에게 가족과 함께 신의주로 가서 그곳의 화가들을 지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항변이나 구명운동을 하지 않고 신의주로 갔다. 유럽에서 독일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동독의 북한 대사관을 드나들며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며 울부짖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신의주에 가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배운성의 부인은 “노인네가 배가 고파서 풀죽을 쑤는 부엌 문지방 앞에 우두거니 기다리고 계신 걸 볼 때면… 배 선생은 나를 따라온 거야. 그분은 그림 밖에 모르는 분이셨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라고 고백했다고 한다.(이충열, <부인 따라 월북한 ‘전설의 화가’ 배운성>, 근대 이야기, 2011. 2. 1) 배운성은 1978년 신의주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8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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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하문로 웅갤러리와 본갤러리의 ‘배운성 전-1901~1978’에 전시된 <빨래하는 여인들>. (출처: 웅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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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의 판화 <건설장(45×20㎝, 1961년)>


잊혀진 작가의 잃어버린 그림들

배운성은 죽는 순간까지 파리에 놔두고 왔던 작품 167점을 몹시 아까워했다. 독일군의 파리 점령때 잿더미가 되었거나 흐르는 세월을 따라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작가로 활동했으나, 남한에서 그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유럽 시절 작품은 남아있지도 않고, 귀국 후 작품은 월북작가인 탓에 보존되지 못했다. 1988년 월북작가의 작품들이 해금되었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을 보기 어려웠다.


1984년부터 파리에서 유학했던 전창근 대전프랑스문화원 원장이 1998~1999년께 배운성의 작품이 프랑스에 무더기로 남아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6개월여의 줄다리기 끝에 두 차례에 걸쳐 48점을 모두 사들였다. 2001년 9월 7일부터 11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배운성 전>을 열었다.


2020년 7월 29일 서울 종로구 홍지동 웅갤러리와 본화랑에서 <배운성 전 1901~1978: 근대를 열다>가 열렸다. 배운성의 대표작 <가족도>를 비롯해 <화가의 아내> <한국의 어린이> <어머니초상> <행렬> <한국의 성모상> 등 유럽 활동 시절 작품 40여 점이 전시됐다(서화동, <한국 근대미술 선구자 배운성의 삶·작품을 들춰보다> 2020. 8. 7).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파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들이 일부나마 이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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