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호 역사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답사기(3)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답사기(3)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2020년 봄에 코로나 대유행으로 실내 집회 금지 조치에 따라 운룡도서관에서 매달 실시하던 운룡역사문화포럼을 못하게 되어서 시작한 야외 역사문화탐방이 매달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토요일 또는 일요일 당일치기 및 1박 2일로 진행돼 2023년 말에 45회에 이르렀다.
운룡역사문화포럼 임원들과 회원들의 요청으로 해외 역사탐방을 계획하고 1차로 2024년 5월 50회 기념 역사문화탐방을 고구려의 역사 유적지가 많은 중국 길림성 집안과 백두산 지역을 선택하여 답사 일정을 계획하였다.
심양에 위치한 중국 현지 여행사의 협조로 5월 26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중국 심양시에 도착한 후 여행사 대절 버스로 환인시로 이동하여 상고성자 고분군, 오녀산성, 오녀산성 박물관을 답사한 후 통화시로 이동하여 숙박한다. 다음날 백두산과 금강대협곡을 답사하고 28일에는 집안시의 국내성 유적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통화시 박물관, 만발자유적지를 답사키로 하였다.
29일에는 통화시에서 출발, 장춘시로 이동하여 장춘박물관, 위만황궁을 답사하고 심양에서 숙박한 후 30일에 심양고궁 및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한 후 귀국하는 일정으로 4박 5일 고구려 유적지 및 백두산 역사탐방을 26명의 회원들과 함께 실시하였다. 역사탐방의 효과를 증진시키고자 먼저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가 기원과 동북아시아에서의 위상 및 수·당과의 전쟁,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오녀산성 성벽
오녀산성 서문지
오녀산성 정상부
999계단을 힘겹게 올라가 끝에 가면 오녀산성이라 쓴 큰 붉은 깃발 두 개가 양옆으로 펄렁거리며 반긴다. 계단 위에 오르면 푸르고 울창한 나무숲의 넓은 평지가 나오고 그 입구에서 숲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잘 쌓여진 성벽이 보인다.
산성은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보여주는 산성이다. 해발 800여m의 높이에 사면은 1500여m의 절벽으로 이루어졌으나, 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병영 발굴유적지
주몽 동상
성벽을 쌓았던 흔적은 서문의 주변과 장대가 있는 정상에서 동쪽과 남동쪽으로 180여m 되는 곳에 남아있다. 완벽한 형태로 높은 데는 거의 6m가 넘었다. 윗부분의 너비는 2m정도이고 아랫부분은 5m에 가깝다. 굽도리양식과 퇴물림 양식을 활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계단 위로 올라가 숲길에서 마주치는 산성이 최근에 중국 당국이 발굴한 후에 정비를 마친 오녀산성 서문이다. 서문의 성문 형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옹성의 초기 형태를 하고 있다. 옹성이란 서울의 동대문 성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문 앞에 둥글게 성을 쌓아 적군이 성문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든 시설물을 말한다. 고구려의 옹성은 대개 凹자 모양으로 만들어 성문을 공격하려는 적을 양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녀산성 정상 평면도
서문터에서 동남쪽 평지로 내려가면 주춧돌 일부가 남아있는 궁궐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온돌의 흔적이 남아있는 병영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곳에서 무덤과 다수의 토기와 기와편, 절구 등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병영터 옆 넒은 공터에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동상이 있는데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중국 당국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동북공정’하는 마당에 그래도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동상을 세웠다는 것은 중국 당국이 고구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장대 쪽으로 가다보면 물이 고여 있는 붉은 글씨로 천지(天地)라고 쓴 돌판이 있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을 천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백두산 천지처럼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아 성안에 사람들이 식수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물이 많아서다. 직사각형의 천지 연못 옆에 작은 수로로 이어지는 사각형의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이 연못 가운데는 돈을 많이 벌기를 기원하는 재물신 동상과 커다란 옆전이 떠있는데 두 연못 사이로 작은 다리가 있고, 이 다리 난간에는 중국 풍습의 소원성취를 비는 붉은 천조각들을 많이 묶어 놓았다.
오녀산성 천지
오녀산성 천지
숲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산 능선에서 굴뚝같이 솟아있는 독수봉의 위용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산성 주변 일대를 전망할 수 있는 장대(將臺)가 몇 군데 있다. 정상에 있는 점장대에 서면 사방이 한눈에 보여서 북쪽에서 오는 적들도 미리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시계가 좋아 최적의 산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대는 전투와 직접 관계되는 것으로 성의 전체 형편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에 설치하여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오녀산성 독수봉
점장대에서 숲 속 길로 절벽 부근에 가면 관운정 정자가 자리 잡고 있어 관광객들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관운정에서 바라보면 환인시가 멀리 보이고 아래로 환인호가 그림 같은 풍경으로 펼쳐 보인다. 동남쪽 멀리서 시작된 혼강이 서남쪽의 넓은 환인분지로 흘러들어가는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지금은 환인댐이 강줄기를 막고 있어 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호수같이 보인다.
장대 끝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500m가 넘는 높이다. 원래 혼강은 해발 197m이고 오녀산성은 820m이니 600m가 넘는 절벽이었다. 댐을 만든 뒤 혼강은 수위가 300m로 높아져 절벽의 높이는 520m가 되었다. 서울 동북쪽에 있는 바위산으로 유명한 불암산의 높이가 508m인 것을 생각하면 오녀산성 절벽의 위용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환인호를 보면서 고구려인들이 이런 멋지고 웅장한 천연요새를 나라의 첫 도읍지로 정하고 성을 쌓았다는 기개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그러나 환인호를 보면서 무척 아쉬운 생각도 든다.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환인호 물속에는 고구려 초기 무덤떼인 ‘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과 장강유적이라 불리는 마을 유적도 함께 수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인현 지역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인의 토착적인 무덤으로 대체로 서기 전후에 발생해서 2∼3세기에는 강가나 강변대지·산기슭에 거대한 무덤떼를 이루게 된다. 또한 시기가 내려올수록 가공된 판석을 재료로 한 기단식으로 발전하고, 내부도 판석으로 짠 돌방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한다. 1950년대 말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고력묘자 고분군’은 고구려 초기 약 3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적석총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유적을 제대로 발굴하지 않고 호수를 만들었기에 고구려 초기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을 간직한 유적지가 수장된 것이다.
점장대
장대에서 동쪽에 있는 동문 근처 성벽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되물림 양식으로 축조된 성벽이다. 이 성벽도 최근에 중국 당국에 의해 허물어진 부분을 보수하고 주변을 잘 정비하여 놓았다. 버스 출발시간 관계로 동문 쪽 성벽을 제대로 못보고 다시 서문터를 지나 999계단을 힘들게 내려와 오녀산성 서문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다 좌측 경사진 도로변을 보니 높이 솟아있는 커다란 비가있어 가보니 대리석 비면에 ‘고구려시조비’라고 쓰여 있고 비석 위 커다란 머릿돌에 삼족오가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을 바라다보면서 중국 당국이 그래도 고구려를 높이 받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녀산성 관운정
오녀산성 환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맨 처음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오녀산성은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중국의 <위서> 동이전에 흘승골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됐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이라고 하고, 삼국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이라 쓰고 있다. 40여년 후 제2대 유리명왕 때에 이곳에서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과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 시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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