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 이야기 Ⅳ

2022.06.29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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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이야기 Ⅳ 

유신체제의 종말… 제9·10대 ‘체육관 대통령 선거’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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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국산 개인화기를 시험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아래) 1987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의 1987년 6·29 선언을 

기획하고 수락하는 모습을 연출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노 전 대통령이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직후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대선 필승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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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장충체육관의 제8대 대통령 취임식장



제4차 중동전쟁과 제1차 석유위기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0개월 후인 이듬해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기습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페르시아만의 6개 산유국들은 이집트를 지원하며 서방에 대해 ‘석유 무기화’를 선언하고 일제히 가격 인상과 생산량 줄이기에 돌입했다. 2~3개월 만에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 고시가격이 11.6달러까지 4배나 폭등했다. 석유 등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 수출하는 한국 경제는 에너지 수급 위기, 외환위기, 무역수지 악화의 3중 직격탄을 맞았다. 석유 공급사들은 공급량을 줄였고 세계경제 위축으로 수출이 감소했으며 해외 지불 원유대금이 급증하면서 외환위기가 닥쳤다. 무역수지 적자폭은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 물가는 1973년 3.5%에서 1974년 24.8%로 뛰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을 대통령 특사로 걸프, 쉘 등 석유 공급사 본사로 보내 담판하여 에너지 공급량을 확보했다. 외환과 국제수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일달러가 모여드는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하는 역발상을 했다. 중동 진출 첫 해(1974) 2억 6000만 달러를 수주했다. 다음 해에는 7억 5000만 달러로 세배, 1980년에는 다시 그 10배가 넘는 82억 달러가 되었다. 1975~1980년 기간 동안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를 중동건설에서 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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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 

한국 경제개발과 중화학공업, 

방위산업의 밑그림을 그린 1등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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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 공사. 현대건설이 1979년 말 완공한 당시 9억 6000만 달러의 세계 최대 규모 공사. 오른쪽) 사우

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 공사. 공사비 절감을 위해 울산에서 만든 철골 구조물을 바지선에 실어 사우디 주베일로 보내 조립했다.



현대건설은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 1976년에는 난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 3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중동특수 덕분에 한국은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경상수지 흑자까지 기록했다.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선용했다. 


제9대 대통령 선거

1978년 7월 6일 유신체제 하에 두 번째로 치러진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박정희 단독 후보였다. 김영삼, 이민우 등 신민당의 비당권파에서는 대통령 후보를 내야 한다며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철승 대표 등 당권파는 직선제 개헌투쟁을 해야 한다며 묵살했다. 신민당은 미국처럼 각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고 대의원 후보들도 자신이 지지 후보를 정한 상태에서 대의원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반대하여 법은 통과되지 못했다.


단일후보인 박정희는 2581명의 대의원 중에 찬성 2577표, 기권 3표, 무효 1표로 99.85%의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혼자 출마하여 거의 100% 가깝게 찬성하여 사실상 선거의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은 간선제 대통령 선거를 ‘체육관 선거’라 했고 ‘대통령 직선제’는 한국 민주화 투쟁의 화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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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범인 김재규의 현장 검증 장면. 오른쪽) 박정희 대통령 서거 보도 기사(1979년 10월 27일)




10·26 사건, 유신체제의 종말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 6년 임기의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0개월 뒤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전 11시경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차지철 경호실장이 마련한 청와대 근처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만찬에 참석했다. 바로 얼마 후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초집중됐다가 갑자기 권력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그날 밤 11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대통령 유고를 발표하고 다음 날인 10월 27일부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조속한 수사를 명령하고 육군 대장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11월 3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 거행됐다. 김영삼은 이 자리에 참석해 “많은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조의를 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가장 선두에서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고, 정권 타도를 외쳤지만 야당 총재로서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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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 유고로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키로 했다”는 글을 기자실 흑판에 쓰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헌법 개정 방침을 밝히고 국민화합을 위해 시국사건 수감자들을 대거 풀어 주었다. 김대중도 가택연금에서 풀렸다. 서울 대학생들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11월 24일 오후 5시경,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 400여 명이 당국의 집회금지 조치를 피해 서울 YWCA회관에서 위장 결혼식을 열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 반대 집회를 열었다.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중단할 것과 국민 합의에 기초를 둔 민주 헌정을 서둘러 출범시키라고 요구하였다. 신군부는 정부측의 호의에 야권이 불법집회로 답한 것을 ‘도전’으로 여기며 경계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유고시 3개월 이내에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 기간 안에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출까지 할 수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일단 현행 헌법대로 새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한 뒤 신임 대통령의 관리 하에 대통령 직접 선거제 헌법 개정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야당은 반대했으나 이전과 같이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새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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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 국민회의 광경. 오른쪽) 1980년 3월 말 계엄사령관 전두환(오른쪽)은 스스로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통고하고 4월 14일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사진은 3월 1일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왼쪽)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는 모습.



제10대 대통령 선출

민주공화당 내에선 김종필 총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이 아닌 민주화 개헌 후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당내 일부 의견이 있었으며 또 신군부가 견제했다. 결국 대선 후보를 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곽상훈 등 대의원 827명의 추천으로 최규하 권한대행이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그는 특별담화를 통해 “‘임기를 채우지 않고 이른 시일 내 헌법을 개정’해 민주적인 새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공약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정원은 2583석이었으나 사퇴 5명, 사망 18명, 불참 11명으로 총 2549명이 참석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2465표(86.29%)를 얻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체육관 선거’는 무효표가 84표나 나오는 등 이전보다 다소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은 12월 21일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그 전인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사실상 식물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12·12 사태

2인자 행세를 하며 위세를 부렸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김재규 총에 사망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전두환 소장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검찰, 경찰, 헌병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전두환은 군내 사조직이자 대통령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하나회를 이끌고 있었다. 특전사의 수도권 4개 여단 중 제1, 3, 5의 3개 여단장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어서 전두환 소장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서울 방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부대들인 30경비단(단장 장세동), 33경비단(단장 김진영)과 헌병단(단장 조홍, 부단장 신윤희)도 모두 전두환의 최측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그를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출시키고 하나회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에서 제거하려고 계획했다. 


한편 전두환 소장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이 10·26 사건 당일 사건 현장에 있었으며 누구보다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임을 알고도 그가 범인임을 밝히지도 않고 즉각 체포하지도 않으면서 김재규와 상황에 대한 협의를 하여 대통령 시해와 관련을 의심했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라지고 열린 정치공간을 ‘서울의 봄’이라 했다. 정치활동이 재개되었다. 권력이 눈앞에 다가온 듯 하자 야권이 분열했다. 4월 7일 복권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한 김대중은 김영삼이 장악하고 있는 신민당 입당을 거부하고, 재야 민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소장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야당과 재야 및 대학생 운동권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새로운 권력으로 대두되자 긴장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의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이었다. 1980년 4월 16일 노사분규가 일어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경찰이 개입하여 어용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했다. 그 틈에 노조 지부장 이재기가 도망을 치자 4월 21일 광부와 가족 6000여 명이 24일까지 4일 동안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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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신군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모인 10만여 명의 군중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0년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철야회의 끝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정치 투쟁을 결정하고 5월 2일 서울대생 1만여 명이 ‘민주화대총회’를 열고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대학가 시위가 더 격렬해졌다. 5월 9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기자회견,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즉각소집, 정부의 개헌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5월 13일 시내 6개 대학 2500여 명이 광화문 일대에서 ‘계엄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했으며 이튿날에는 37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5월 15일에는 30개 대학 10만여 명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했는데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가두시위 격화가 신군부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하여 5월 16일 교내 및 가두시위를 일단 중지할 것을 결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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