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13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박근혜 대통령

2023.06.2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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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13

제 18대 대통령 선거와 박근혜 대통령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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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지만·근령 등 가족들과 찍은 기념사진


박근혜 대통령을 말하는 별명들이 많다. ‘대통령의 딸’ ‘선거의 여왕’ ‘최초의 여성 대통령’ 그리고 ‘탄핵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최초의 대통령’ 등. 우리 모두에게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권력의 그녀에 게도 영광과 그림자가 동시에 아주 짙게 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 모두를 엄청난 비극적 사건으로 잃고 그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깊은 상처의 사람 박근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빈껍데기 권력을 경험하며 그 자신이 한국 헌정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큰 상처가 되었다.


대통령의 딸

박근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육군 소장으로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아버지가 1963년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되자 12살에 대통령의 딸이 되어 청와대 구중궁궐 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교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해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광복절 경축식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대통령을 향해 저격한 총탄에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피격 사망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그녀를 정치의 한가운데로 불러냈다.


그녀는 대통령 아버지 곁에서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마저 부하의 총에 피격 서거했다. 그녀는 16년 만에 청와대를 나와 아버지의 집권기간 만한 18년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국민들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감사했고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사랑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큰딸’ 박근혜에 대해 ‘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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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어 축하받고 있는 박근혜


선거의 여왕

1997년 11월, ‘민주화’ 대통령 김영삼 정부 하에서 국가부도인 IMF 사태를 맞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니!’ 그녀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맞선 한나라당 이회창을 위해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회창은 당선되지 못했다.


이듬해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영남 텃밭의 이점도 있었으나 대중 속에서 악수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진실함이 전달되었다. 이후 제15대부터 제19대까지 연속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정치중립 위반이라며 추진한 탄핵 사태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탄압을 주도했던 한나라당은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했으며, 최하 50석까지 몰락할 위기에 직면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180석. 최대는 200석까지도 전망되었다.


절체절명의 한나라당 위기 상황에서 박근혜가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여의도에 천막과 컨테이너로 당사를 마련하여 지도자로서 결단력과 진정성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서 선거를 지휘하여 총 299석 중 열린우리당이 152석,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당을 구함으로써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으로 리더십을 각인시키며 당내 입지를 다졌다.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지원 유세 중 서울 신촌 로터리에서 한 남성이 휘두른 문구용 칼에 안면이 찢기는 큰 자상을 입고도 “대전은요?”라고 하며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명실상부하게 ‘선거의 여왕’임을 재확인하며 대권 주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여 당내 비주류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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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당시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이 한나라당 박근혜 신임대표를 찾아 난화분을 전달하는 모습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계가 대거 공천에서 배제당하는 ‘공천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전국구 8석 계 14석을 확보하고, 친박무소속연대도 12명이 당선되면서 박근혜의 위력을 다시 입증했다.


2010년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로 수도 이전에 반대하고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다. 박근혜는 ‘국민과의 약속’ ‘신뢰’를 강조하며 야당과 연대해 국회에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2012년 4월 11일에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2011년 하반기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야권은 MB정부 심판론을 내세우며 야5당 연대로 박원순을 서울시장으로 당선시켰다. 그 후 2011년 11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한미 FTA를 다수결 처리 하자 야권 지지층의 결집이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정권 말기 선거는 야당에 유리했다. 야권은 총선 승리와 다수당이 되는 여소야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해 12월, 민주당은 원외 친노무현 및 시민 세력이 시민통합당과 합쳐 민주통합당을 창당했다. 진보진영은 2012년 1월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위기를 느낀 한나라당은 2011년 12월 박근혜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박근혜는 노태우 정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이었던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해 ‘경제민주화’라는 좌파적 정책을 내걸었다. 청년층 지지를 얻기 위해 26살의 이준석도 비대위원으로 영입했다. 2012년 2월에는 새누리당으로 당명과 로고도 바꾸었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 기관과 전문가들은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이 우세를 점할 것으로 예측했다.


선거 결과 새누리당은 지역구 127석, 비례대표 25석 합계 152석으로 총 300석 중 과반을 차지하며 승리했다. 민주통합당은 지역구 106석, 비례대표 21석 계 127석으로 2위에 그쳤으며 통합진보당이 13석이었던 것에 비하여 자유선진당은 5석으로 몰락하여 심대평 대표는 정계를 은퇴했다. 새누리당으로의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내에서는 친이명박계가 퇴조하고 찬밥신세였던 친박이 전면 등장하게 되었고 선거를 진두지휘한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는 차기 대권을 위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MB정부 심판론에만 기댄 채 여유롭게 과반을 낙관하다 원내 1당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18대의 81석에서 46석이 늘어난 127석을 확보했다. 선거 연대한 통합진보당 의석을 합치면 140석이 되어 여당을 견제할 수는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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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박근혜 후보 승리 인사 광경 (출처: 이데일리)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선출

새누리당은 대통령 후보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승리를 이끈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확고한 입지를 다진 가운데 최종적으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안상수 인천광역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태호 의원 등도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8월 19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을 위한 투표와 여론조사가 실시되었으며, 8월 20일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84.0%이라는 역대 최대 경선 득표율을 기록하며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2위는 8.7%를 득표한 2위 김문수 전 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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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선출

런던올림픽 이후로 후보 선출을 늦춘 민주통합당은 바빠졌다. 새누리당 텃밭 부산에서 내리 3선한 조경태 의원,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건 손학규 전 대표,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 문재인 전 의원, 김영환 전 의원, 김두관 경남지사, 정치 1번지 종로구 정세균 의원, 김정길 의원, 박준영 전남지사 등 8명이 출마선언을 했다. 이 중 7월 28일과 29일에 걸쳐서 여론조사를 통해 하위 3명을 탈락시키고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박준영 후보로 압축했다. 


8월 25일 제주특별자치도를 시작으로 전국 시도를 돌며 경선이 진행되어 마지막으로 9월 16일, 서울 경선을 치렀다. 전국의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권리당원과 대표선거인단의 투표결과와도 비슷하게 56%대의 득표율로 과반 득표율을 확보하여 결선투표 없이 바로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무소속 안철수

의사이자 컴퓨터 바이러스 프로그램 개발자이며 경영인인 안철수 교수는 2011년 10월의 서울특별시장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려다 자신보다 지지율이 한참 낮은 박원순 후보를 지지하며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정치 참여나 대선 출마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각종 여론조사 등에서 박근혜 후보에 맞설 유일한 후보로 간주됐다.


그는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출판했고 전국의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각층 대중과 대담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혀가고 있었다. 9월 19일, ‘국민보고대회’라는 형식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 선거 출마 결심을 밝혔다. 야권의 단일화 요구에 응하여 문재인 측과 안철수 측은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여러 요인이 겹쳐 당초 지지도에서 문재인에 2~3% 정도 앞서던 안철수는 대선을 약 1달 앞둔 11월 14일 지지도에서 역전당한 후 회복되지 않았다. 양측은 끝내 단일화 합의에 실패했으며 안철수 측은 11월 23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문재인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타 진보진영 등

진보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의 내분 이후 구 민주노동당 인천연합계,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출신 정치인들이 탈당해 만든 정당이다. 진보정의당은 10월 17일 심상정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남은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19대 총선에서 5석으로 몰락한 자유선진당을 이은 선진통일당은 이인재 대표가 출마를 저울질하다 포기하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10월 25일, 새누리당과 합당을 발표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2012년 12월 19일 실시되었다. 유권자 수 4046만 4641명에 투표율은 75.8%로서 제17대 대통령 선거보다 12.8%가 늘었다. 

후보자별 득표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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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고 기억되며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1대1로 맞대결한 선거였다. 야당은 정권심판론을 내세웠고,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라는 아젠다를 내걸고 좌클릭하여 중도표를 흡수하고자 했다. 그 결과 투표율 70%가 넘으면 진보진영 후보가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75%가 넘는 높은 투표율에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최초의 대를 이은 대통령. 여성 대통령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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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전임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박근혜 신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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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취임선서 (출처: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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