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14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문재인 대통령

2023.06.2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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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14

제19대 대통령 선거와 문재인 대통령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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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당시 세월호 사고 현장 (출처: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궐위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3월 10일 탄핵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급전직하로 추락하게 된 계기는 세월호 침몰사고였을 것이다. 세월호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 경 일반인 151명, 제주도 수학여행 단원고교생 325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한 여객선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급회전하면서 전복, 침몰하여 172명을 구조하고,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하여 304명이 사망하였다.


특히 250명의 ‘생때같은’ 어린 목숨의 대거 희생, 구조자 172명 중 절반 이상은 해양경찰보다 약 40분 늦게 도착한 어선 등 민간 선박에 의해 구조되어 해양경찰을 비롯한 정부와 청와대의 늑장 대응에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이로부터 박근혜 정부의 무능,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비선실세 의혹, 대기업 뇌물 의혹 등등의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국회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의원들이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 소추를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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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2016년 12월 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권성동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탄핵소추의결서 정본을 접수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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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30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탄핵은 국회에서 재적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면 효력을 발생한다. 탄핵을 추진하는 범야권 의원과 탄핵에 찬성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용태 의원을 합쳐도 172명으로, 탄핵의결 지적의원 300명에 의결 정족수 200명에 비하면 28명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해 표결한 결과는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탄핵이 가결되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새누리당 내에서 그만한 수 이상의 의원이 찬성하여 “자기 당 대통령 등에 칼을 꽂았다”고 이야기되고, 찬성 의원들에게는 ‘배신자’의 꼬리표가 붙어 다니게 되었다.


국회를 통과하면 국회 사무처 의안과장이 탄핵소추 의결서 사본을 가지고 청와대로 가서 송달한다. 그 문서를 대통령이 전달받은 순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다. 다른 한편 국회법사위원장은 탄핵소추의결서 정본을 헌법재판소에 전달한다. 탄핵심판이 나올 때까지 대통령 직무는 국무총리였던 황교안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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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면. 문재인 후보자의 선거유세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 이틀 후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갔다. 그 전 3월 3일부터 검찰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고 2018년 8월 24일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는 징역 25년과 벌금 200억 원을 선고했으며 그 외에 여러 사안에 대해 여러 차례 판결이 이루어져 형량이 더해져 수감되었다. (2021년 12월 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복권을 하고, 잔여 미납 벌금도 면제되었다. 현재는 자신의 지역구였던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 마련한 자택에 머물고 있다.)


대통령 선거일 공고와 야권의 후보 선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없었다면 2017년 12월 20일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탄핵 소추됨에 따라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자 국회의 요구로 2월 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7년 5월 9일 선거’를 잠정 결정했다. 이후 탄핵이 결정되자 궐위 사유가 발생한 3월 10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3월 15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국무회의는 5월 9일을 대통령 선거일로 하고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다.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 지지도는 급상승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을 입은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상임고문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이재명 전 성남시장이 대권주자로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민주당 후보군의 지지율이 도합 60%까지 상승하여 민주당이 압승하게 보였다. 그런 만큼 경선은 치열하여 각종 잡음을 낳았다.


문재인 후보가 최종 승리하자 안희정·이재명 지지층 일부는 경선 이후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대안으로 택했다. 안철수 후보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안희정을 지지했던 충청·보수층이 대부분 안철수 후보에게 지지를 몰아주었다. 야권이 양자 구도가 되어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 대세론을 크게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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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직운동장 거리. 안철수 후보자의 선거유세


안철수 후보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 공세가 시작되었다. 군입대 과정, 부인 김미경 교수 갑질 논란 등 온갖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안철수 후보는 보수층을 얻기 공략하기 위해 자신을 ‘반문 보수 후보’로 정체화하려 했다. 그러나 원론적인 주장만 했지, 자신의 공약조차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거나 국가적 이슈 사안에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안철수 후보 지지율은 다시 폭락했다.


영남권의 압도적 지지율은 홍준표 후보에게 쏠려 안철수 후보는 문재인에게도 밀린 지역 3위로 내려앉았다. 결국 안철수 후보는 호남을 포함하여 어느 한 기초자치단체에서도 1위를 차지하지 못하며 최종 3위로 마무리했다. 그리하여 야권의 대통령 후보는 ‘어대문(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문재인)’이라 했던 대로 문재인으로 굳어졌다.


자유한국당 후보 선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여당인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폭락했다. 범여권에서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을 영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기문은 의지와 결단을 보이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검증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출마를 포기했다. 한 달이 허비되었다. 보수진영에서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대통령 권한대행 과정에서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고, 출마 결심을 질질 끌다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간만보다 포기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또 한 달 반의 시간만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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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본명 최서원)


성완종 금전 상납 리스트에 올라 재판에 계류되어 있었던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2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홍 전 경남지사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실제 모델이었던 강골 검사 출신, 서울에서 4선 국회의원, 재선 경남지사, 원내대표 1회, 당 대표 2회를 거치면서 경륜과 뛰어난 행정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동대문구 을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청량리 588 집창촌을 철폐하고 주상복합단지로 재개발하였다. 경상남도지사를 하면서 경남 채무 0원, 청렴도 1위, 무상급식 감사로 비리 개선, 만성 적자 홍성의료원 폐쇄, 사천과 진주에 항공우주 산업단지, 밀양 나노산업단지, 거제도 해양 플랜트 산업단지 등 적극적인 일자리를 유치하여 경상남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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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포동. 홍준표 후보자의 선거유세
 


그러나 당시 전국적 지지도로 보면 반기문·황교안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었던 까닭에 자유한국당은 홍준표 지사를 과반이상의 지지로 대통령 후보에 선출했다. 


선거 초반부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대세론이 굳혀져 이를 견제하려는 세력 간에 이른바 ‘문재인 vs 비문 연대’구도가 형성되었다. 안철수·유승민·홍준표 등 중도 및 보수 진영의 후보들을 두고 비문 단일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었으나, 탄핵으로 인해 갈등의 골이 깊어 적극적으로 단일화에 나서거나 스스로 사퇴 의사를 밝히는 후보가 없어 무산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선거전은 문재인·홍준표·안철수·유승민·심상정의 원내 5대 주요 정당 후보들 간의 5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었다. 전체 입후보자 수는 처음에 15명이었고, 그중 남재준(통일한국당), 김정선(한반도미래연합) 2명이 사퇴하여 13명이었다. 역대 최다 출마자 기록이었다. 군소 후보로는 조원진(새누리당 국회의원), 오영국(경제애국당), 장성민(국민대통합당), 이재오(늘푸른국민당), 김선동(민중연합당), 이경희(한국국민당), 윤홍식(홍익당), 김민찬(무소속)이 있었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4월 5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일주일만인 4월 12일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선거전

대선인 관계로 유세 기간은 총 22일로 가장 짧았으나 소셜 미디어 시대를 맞아 유튜브 등과 예능, 패러디를 통한 적극적이고 활발한 온라인상의 선거운동과 파격적

인 시도가 이뤄졌다.


후보 포스터는 전국의 8만 7000여 곳에 게시되었다. 사상 최다 후보가 등록되어 후보자 벽보의 길이도 역대 최장으로 10m에 달했으며, 2열로 나눠 붙여도 가로 5m,

세로 1.6m의 공간이 필요했다. 4월 13일부터 5월 2일까지 5개 주요 정당 후보자TV 토론회가 있었고, 그 외 군소 후보자TV 토론회가 4월 24일 1차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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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투표결과 

2017년 5월 9일 본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선거인 수는 4247만 9710명으로 투표율은 77.2%를 보였다. 5월 4일부터 5월 5일까지 대통령 선거로는 사상 처음으로 사전 투표가 실시되었다. 사전투표에는 1107만 210명이 참여하여 전체 선거인 수의 26.06%가 참여했다.


사전투표 비중이 당락을 좌우할 만큼 커지자 이후 부정선거 시비의 초점이 되었다. 최종 개표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1342만 3800표를 얻어 득표율 41.08%를 기록하며 1위로 당선되었다. 2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785만 2849표(24.03%)로, 1위와의 득표 차이는 557만 951표 차이가 났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699만 8342표(21.41%)를 얻어 3위,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220만 8771표(6.71%),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201만 7458표(6.17%)로 각각 뒤를 이었다. 2007년 12월 19일 실시한 17대 대선 노무현 대통령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민주당계가 다시 정권을 교체하게 되었다.


공직선거법 제14조(임기개시)에는 “대통령의 임기는 전임대통령의 임기만료일의 다음날 0시부터 개시된다. 다만, 전임자의 임기가 만료된 후에 실시하는 선거와 궐위로 인한 선거에 의한 대통령의 임기는 당선이 결정된 때부터 개시된다”는 규정에 따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만료가 아닌 궐위로 인해 선거가 치러진 관계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으로 지내는 기간이 없으며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꾸리지 않은 채 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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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 소식에 환호하는 문재인 후보 (출처: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文在寅, 1953. 1. 24)은 전 대통령 노무현과 법무법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고, 참여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쳐 제19대 국회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역임했다. 경희대학교 법대 재학 4년 장학생을 들어가 박정희 유신 독재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되었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마친 후 복학해 다시 학생운동을 이끌며 전두환 군부 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구치소에 투옥됐으나 조영식 경희대 총장의 신원보증 하에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석방되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거부됐다고 알려졌으며,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대선에 출마하여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어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하였고, 2017년 5월 1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당선인 결정을 발표하자 오전 8시 9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바로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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