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호 역사 ‘전생의 인연… 시비는 공허한 것’ 부여능사 목간에 쓰인 백제 노래
‘전생의 인연… 시비는 공허한 것’
부여능사 목간에 쓰인 백제 노래
글·자료 이림 시나리오 작가, 허선(국악인)
사진 백은영, 이태교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왕릉원.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9~660)의 백제왕릉이다.
사진은 백제 사비시대 왕 다섯 분의 능으로 이곳을 지킨 능사에서 백제가요 <숙세가> 목간이 출토됐다.
부여능사 목간에 쓰인 백제 노래
왕릉 절터에서 찾아진 노래 지금부터 20여 년 전 부여군 능산리 절터 인근 발굴현장에서 뜻밖에 주목되는 유물이 찾아졌다. 능산리는 백제 후기 여러 왕이 묻힌 곳이며, 절터는 왕릉을 위해 지어진 절이었으나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있다.
발견된 유물은 먹 글씨로 쓴 고색창연한 목간(木簡)이었다. 목간이란 종이가 없었던 고대에 사용됐던 막대처럼 다듬어 면을 만든 용구다. 글씨는 잘 쓴 해서체로 모두 4자씩 20자였다. 목간의 글씨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 목간은 국문학자들이 해석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 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 / 시비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 / 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
그런데 필자는 이 노래를 다음같이 해석해 보았다. 마지막 연의 ‘백래(白來)’를 ‘공(空)’ ‘일 없는 것’으로 보았다. (白 ‘可以說是空,没有,没意思’ (…) 空來一場:白來了 / 고전 <說文> 해석)
宿世結業 (숙세결업)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同生一處 (동생일처) 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
是非相問 (시비상문) 서로에게 시비를 따진다면
上拜白來 (상배백래) 공경하고 절을 한들 모두 헛된 것입니다. (필자의역)
부여왕릉원
<숙세가> 목간
학자들은 이 기록을 새로운 백제 노래 <숙세가(宿世歌)>라고 명명했다. 4언은 고조선 ‘공무도하가’가 그렇듯이 고대 백제 가요로 본 것이다. 숙세라는 명칭은 해
당 목간이 ‘숙세’라는 단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2003년 당시 김영욱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숙세가>는 7세기 중엽 백제인이 이두로 지은 백제시가”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 백제 노래는 누가 누구를 위해 부른 것일까. 그리고 이 목간은 왜 절터 흙속에 묵혀 천수백 년 만에 세상에 햇빛을 드러낸 것일까. 한 시인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완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숙세가>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감탄했다. “1500여 년 전 조상들의 상상력에 탄복할 따름이다”라고 극찬한다.
또 한 국문학자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배려하는 백제인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고 풀이했다. 한 불교학자는 논문에서 “숙세선업(宿世善惡)의 업(業)을 관찰하여 참회(懺悔)한 후 삼세과보(三世果報)의 차별상(差別相)을 점쳐 보는 의식인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백제에서도 행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전생의 인연으로 서로 인연을 맺은 사이인데 시비를 가려 무엇 하겠습니까. 모두가 공(空)인 것을….’ 왜 이 목간이 왕들을 모신 능사 유적에서 발견된 것일까.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
창왕(昌王)사리기 명문 탁본
절터에서 찾은 석조 사리감실
능산리 절터에서는 목간과 함께 뜻밖에 성왕을 추모하는 석조 사리감(舍利龕)이 찾아졌다. 양쪽 면에 각각 1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통해 567년 창왕(昌王, 위덕왕) 시기 누이로 추정되는 매형공주(?)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한 사리기임을 알 수 있었다. 크기는 높이 74㎝, 너비 50㎝나 된다. 해서로 정연하게 각자된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창왕의 누이라면 바로 성왕의 딸이 아닌가. 이 명문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다. 한 학자는 이를 ‘妹’인 ‘長公主’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이 절을 세운 이는 창왕(위덕왕)의 누이 중 맏이 공주가 된다. <설문(說文)>에서는 “‘兄’을 ‘長也(장야) 總儿總口(총인총구) 兄之屬皆總兄(형지속개총형)’이라 했으니 ‘창왕의 맏누이가 사리감을 공양했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兄(형)’ 자에 대한 해석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씨는 형자 보다는 ‘完(완)’자에 가깝다. 매형공주인가, 매완공주인가. 글자 해석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글씨는 앞으로 연구 대상이 된다.
공주라고 하여 모두 딸인 것만은 아니다. 고려 때 원나라에서 시집 온 공민왕의 비는 ‘노국공주’로 불렸다.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무왕 비는 선화공주다. 성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사리를 공양한 ‘공주’를 굳이 창왕의 누이로 정의할 이유는 없다. 고대 왕가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하여 가까운 친인척간에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이 ‘석조감실’과 <숙세가>는 또 어떤 연관을 지니는 것일까. 혹 공주가 세상을 떠난 성왕을 그리워 노래한 것은 아닌가. 공주는 사리감을 공양하면서 전생의 업으로 인연을 맺은 사자의 명복을 빌었는지 모른다.
목간이 발견된 곳, 왕들이 묻힌 능사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 나성(羅城)의 동쪽 바깥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나성은 왕도 부여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토석축의 외곽 장성이다. 조사결과 총 6㎞가 넘는다는 보고서가 있다.
백제 왕릉을 지키고 있는 능사와 나성. 이 절터에서 <숙세가> 목간이 출토됐다. 나성(羅城)은 성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성 즉 외성을 이르는 말로 낮은 언덕
을 따라 복원된 외성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고분군은 총 3개의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능산리 고분군은 처음 발견됐을 때는 6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보수공사 중 7호분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능산리 고분군의 동쪽으로 무덤 5기가 모여 있는 고분군이 발견되어 이를 능산리 동고분군이라고 하며, 서쪽 4기의 고분을 일컬어 능산리 서고분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능산리 고분군은 고분 내에서 사신도 벽화나 금동 유물 등이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백과 자료를 보면 고분의 최초 조사는 1915년 7월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関野貞)가 각각 조사단을 이끌고 실시했다. 이때 사비도성 동쪽의 능산리산 남사면 하단부에서 왕릉급 6기의 고분을 확인하였고, 이를 각각 동하총(東下塚), 중하총(中下塚), 서하총(西下塚), 서상총(西上塚), 중상총(中上塚), 동상총(東上塚)이라고 이름 붙였다.
능산리 고분군의 무덤들은 원형봉토분으로 대체로 밑지름이 20~30m이며, 봉토 주변에 호석(護石)이 배치된 것도 있다. 내부구조는 널길(고분의 입구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통로, 무덤 바깥 길(墓道)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져 있다)이 있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뚜껑 돌 아래로는 모두 지하에 조영된 지하 석실분이기도 하다.
화려한 금동향로의 발견
능산리 절터에서는 백제시대 만들어진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출토되었다. 정교한 백제 정신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능산리 절터의 목곽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보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금동대 향로에 사용된 도금과 주조 기술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기술적 성과라는 평가가 있다.
용 모양의 향로로 높이가 61.8㎝나 된다. 백제에 첨단 기술을 가르쳐준 고대 양나라에서도 이런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다. 향로 본체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향로의 뚜껑 부위에는 승마 수렵상, 신선,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이 조식되어 있다. 정상에는 왕, 혹은 왕비를 상징하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또한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이 향로는 백제시대 음악의 수준을 알려주는 유물이 된다.
벡제 왕들은 제삿날이면 이곳에 나와 장중한 음악에 맞춰 제례를 한 것인가. 금동향로에 향을 피워 영혼을 부르고 사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했던 것이다.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왕도 이전 영웅의 죽음
6세기 중반 백제는 성왕 대 웅진에서 넓은 땅인 소부리로 왕도를 옮긴다. 왕도가 자리 잡은 곳은 부소산을 배경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천혜의 길지였다. 백마강이 굽이쳐 부소산을 에워싸는 형상인 이 지역은 수로로 서해를 쉽게 나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백제를 해양왕국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다. 일찍이 바다로 지금의 저장성인 중국의 남조와 통하고 산동반도를 통해 북위 북제와도 교류했다. 3국 가운데 가장 먼저 대륙의 발전한 문화를 수용했다.
남조 양나라 무제(武帝)로부터 돈독한 신임을 얻은 성왕은 소부리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대도시를 구상했다. 이 시기 백제는 제2도약기를 이루었다. 비록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겨 여러 번 수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소부리에 제2건국에 맞는 왕도건설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써 왔던 국호 백제를 버리고 자신들이 부여의 후예임을 선언하는 남부여(南扶餘)라고 한다. 이 국호의 개명은 백제 지배층의 연원을 밝히는 중대한 선언이었다. 성왕은 이 시기 과거 부여 땅이었던 구 지역의 여러 성과 유민들을 아우르고 부여국의 복국을 위해 선두에서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정사 <구당서> <신당서> 기록에 백제의 영토가 바다를 건너 중국 땅 월주(越州)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성왕은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옛 부여 땅을 그리고 동쪽으로 왜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을 구상했던 것이다.
부여 신왕도는 남북으로 큰 주작로를 만들고 그 양편으로 바둑판 같이 구획하여 관청과 사찰 주택을 건설토록 했다. 고대 한나라 황도건설의 예와 양나라 수도 건강의 구도를 따랐다.
백제문화재단지 내 장중한 백제식 건물로 복원된 능사
대표적인 근거가 바로 부여 시가지를 관통하는 고대 도로다. 부여왕궁지에서 정림사를 통과하여 궁남지로 연결되는 남북일직선상의 대로는 바로 사비시대 주작대로(朱雀大輅)였다. 궁남지는 백제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나가 주유하던 곳이다.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온갖 식물과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은 이미 한성시대에도 있어온 사례였다.
성왕의 참변
성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23~554년이며 무령왕의 아들로 즉위했다. 중국 양나라와 교류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숙원 과제이던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해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 6군을 회복했으나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군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기도 했다.
성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와는 평화를 추구하고 싶었다. 진흥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으며 과거 동성왕이 누린 나제동맹의 부활을 염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왕의 착각이었다. 소백산을 넘은 신라군은 남한강 일대의 여러성을 정복한 다음 서쪽으로는 금강 상류 미호천 유역까지 진출했다.
가장 첨예하게 부딪힌 지역은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이었다. 백제 공주 부여로 통하는 인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빼앗기면 공주 부여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긴장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리산에 태자인 여창(나중에 창왕)이 직접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주둔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납치되어 전사한다. 성왕의 전사에 대한 우리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본다.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일본 측 기록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왕 32(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제4. 성왕 32년조)
진흥왕 15(554)년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 경주)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明襛=성왕)이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현재 서울 강남구) 군주(軍主)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북 보은) 출신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2만 9600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15년조)
<일본서기> 권19 흠명천왕(欽明天王) 15년조에 여창(餘昌, 백제 성왕의 아들, 27대 위덕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노신들이 간하여 “하늘이 아직 우리를 돕지 아니합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노신들이 어찌 겁이 많은가. 무슨 두려울 것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관산성, 지금의 옥천)에 요새를 쌓았다. 아버지 명왕(明王, 성왕의 본명이 명농(明襛)이었으므로 명왕(明王)으로 씀)이 걱정하여 “여창이 오랜 싸움에 괴로움을 당하고, 오랫동안 침식을 폐함이 많았다. 어버이의 은혜가 많이 빠졌고, 아들로서 효도도 이루기가 드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왔다는 것을 듣고 나라 안의 군사를 모두 일으키고 도로를 막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는 좌지촌(佐知村, 충북 보은)의 사마노 고도(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知))에게 “고도는 천한 종놈이요, 명왕은 이름 있는 왕이다. 지금 천한 종으로써 군왕을 죽이게 하려 한다. 후세에 전하여져서 길이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붙잡아 재배하여 “왕의 머리를 베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종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했다(一書에 명왕이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주어 베게 하였다라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여 눈물을 흘렸다.
허락하여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 머리를 늘여 베임을 당하였다. 고도는 참수하여 죽인 후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一書에 말하였다. 신라는 명왕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두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명의 뼈를 북청(北廳)의 계하(階下)에 묻었다.)
부여 궁남지에 핀 연꽃
일설에는 신라군이 성왕의 목을 보자기에 싸 고리산에 진주한 여창(창왕)에게 보냈다고 한다. 부왕의 목을 본 여창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백제와 신라는 이로부터 하늘을 같이 하고 살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된다.
성왕의 전사로 금강 상류 옥천을 지배한 신라군은 120년 후 이 길로 백제 수도 부여를 기습 공격하는 첩경으로 삼았다.
에필로그
돌아오는 길에 답사반은 마침 부여박물관이 기획한 목간전시회를 보았다. 능사에서 찾아진 <숙세가> 목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여러 유적에서 나온 목간들을 보면 백제가 목간의 나라라는 별칭이 실감난다. 정림사지와 궁남지를 돌아 능사를 복원한 백제문화단지를 찾았다. 백제시대 유행했던 오방색 인동당초문양이 복원된 건물의 외벽에 화려하게 재현됐다. 아~ 백제는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였나.
능사의 백제목조5층탑의 화려한 위용을 대하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왕궁 정전의 장중함은 위대했던 백제 복원이라는 점에서 가슴에 와 닿는다. 롯데 고(故) 신격호 회장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위대한 백제를 재현한 위업을 남겼다. 어느 재벌이 이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부여 중심가에 있는 왕찰 정림사지.
5층석탑이 옛 영화를 알려주고 있다.
취재가 끝나고 막상 백제 부여를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 짝이 없다. 백제의 가요를 듣고 싶었다. 어떤 가요가 있을까. 아, 1940년에 나온 가수 고(故) 이인권의 <꿈꾸는 백마강>이 있지 않나. 이 가요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받기도 한 노래다. 고란사 종소리에 구곡간장이 찢어진다고 한 <꿈꾸는 백마강>을 포털에서 찾아 재생해봤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1400년 전 나라의 운명을 지켜본 백마강은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미처 부르지 못한 백제의 노래 <숙세가>가 울려 퍼지는 날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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