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역사 슬픈 고종

2021.07.27 글마루
0 280


슬픈 고종 


글 이정은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5386.png

광무(고종) 황제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603.png

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출범 후 고종의 덕수궁 행렬




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망국은 <병합조약>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순간에 이루어졌었지만, 광복까지는 35년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그 35년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는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얼마나 많은 개인과 가족이 희생되고 고통을 겪었던가! 그러나 해방으로 고통이 끝나지도 않았다. 1000년 이상 이어온 통일국가가 분단되었던 것도, 3년간의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망국의 연장선상에 원인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망국의 군주가 된 고종. 대대로 이어받은 왕좌를 지키지 못한 고종. 최고 권력자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해 국민을 비극 속으로 빠뜨린 왕, 두고두고 역사에 깊은 상처를 안긴 고종은 슬픈 군주였다.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6509.png

서양식 실크 모자를 쓴 고종(대한제국)




개명군주 고종이 슬픈 것은

망국의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동양의 평화를 깨고 침략자의 길로 들어선 일본과 그 제국주의적 탐욕이 1차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일본을 비난하며 일본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이 침략해 왔지만 우리가 잘 대비하여 침략을 물리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러기에는 일본이 너무나 교묘하고 악랄했을까? 우리가 너무 순진했을까? 악의 세상에서 악을 알지 못하고 순진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을까?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한 우리는 발전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분석하고 앞으로 그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역사를 거울로 삼는 참된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학교에서 이런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 이 또한 슬픈 일이다. 


조선의 망국은 고종의 부국강병의 개혁 실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란 국민이 잘 살게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고종은 44년간 제왕의 자리에 있었다. 그중 아버지 대원군이 대리정치를 한 10년을 제외하면 1874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제26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 기간이 무려 33년이다. 고종이 포부도 없고 의지도 없는 무능한 왕이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고종은 1875년 9월 일본이 강화도에서 도발한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고수해왔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항을 했다. 일본은 그해 5월 초 연안측량을 빙자하고 군함 운요호(雲揚號)와 제2히노토우호(丁卯號)를 조선에 파견하여 동서 연안을 종횡무진 탐측하면서 포함(砲艦)으로 무력시위를 하고, 9월 20일 수도 방어의 요새지인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침입하였다. 조선 수비병이 방어 차원에서 육지로 접근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했다. 이에 운요호에서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살육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것이 운요호 사건이다.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7085.png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마차에 앉은 왼쪽과 오른쪽 사람)이 경운궁 수옥헌으로 향하고 있다. 

훗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수옥헌은 중명전으로 이름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알듯이 이듬해인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의 개항은 일본에 의해 강제되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조선의 방향이 개항과 개혁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재야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추진했다. 또한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사상과 윤리 바탕 위에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명’을 표방하며 서양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1885년 4월 개신교가 선교허가를 신청한 지 하루 만에 승인을 받은 것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근대화를 위한 개혁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방 유생들은 계속 반대했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같이 정권의 배가 뒤집힐뻔한 정변을 겪었다. 왕은 세 차례나 아버지 대원군에게 권력을 양보하고 뒷방으로 물러나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권좌에 복귀하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 33년 친정기간 동안 개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슬픈 것은 개혁을 추구했던 그의 나라 조선이 부국강병은 고사하고 망국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이 반세기를 불행과 굴욕,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굴욕과 불행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울과 지방, 국내와 해외의 거리에서, 산골짜기에서, 그리고 감옥과 처형장에서 피를 쏟아야 했다.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7692.png

1882년 임오군란은 선혜청 관리들이 구식 군인들의 급료 중 일부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 준 것이 원인이 됐다.




세 가지 문제

고종의 비극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33년간 왕의 끈질긴 개혁 노력에도 백성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개혁으로 인해 과중한 부담만 떠안고, 피로감만 누적됐다. 왕은 시대를 새롭게 하는 개명 개혁 군주를 꿈꾸었으나, 개혁은 민생과 괴리되어 겉돌고만 있었다. 이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개혁군주 고종에게 개혁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체감되지 못한 것이 최대 약점이었다. 


둘째, 33년 동안 개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고종은 개혁을 뒷받침해 줄 측근세력을 구축하는 데 집착했다. 왕권에 대한 위협이 계속됐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후 민씨의 일가친척들을 끌어 모았다. 이 측근세력으로 별도의 권력기구를 만들어 의정부라는 공식 정부기구를 무시하고 파행적으로 운영했다. 문제는 이러한 왕의 최측근 개혁추진 세력에게 국가와 국민과 왕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사명의식과 열정,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없었다는 데 불행이 있었다. 개혁 주도세력 주변에서 부패의 냄새가 진동했다. 개항 6년 만에 터진 임오군란은 급료를 주는 선혜청 관리들이 13개월이나 밀린 구식 군인들의 급료 중 일부를 주면서도 일부를 착복하고 모래를 섞어 준 것이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정부 밖에 내무부라는 별도 개혁추진 기구를 세워 민씨들로 채운 후 10년간 개혁을 밀어붙인 끝 무렵에 터진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의 부정부패와 이로 인한 ‘동학농민운동 발발’이 그것을 말해 준다. 개혁추진 기간 내내 안으로는 썩어서 곪아 문드러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의 군주 고종이 오랫동안 끈질기게 추진했던 개혁으로 국민들 삶이 윤택해지지 않았고, 국가가 부강해지지도 않았다. 개혁을 주도한 측근 세력 배만 불렸다.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8207.png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이 압송당하는 장면(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셋째, 마키아벨리는 역모를 막는 길은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는 권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역모,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지킬 충분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도전받을 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타협하여 권력을 민주화해 가는 길이다. 서구나 현대 한국 민주주의 역사가 그 길을 걸어왔다. 다른 한 길은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길이다. 이것은 스스로 속박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고종이 걸었던 길이다. 


고종은 위기 때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위해서는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다. 외세를 불러들인 것이다.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청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것이 청국의 심각한 내정간섭을 불러들였다. 고종과 민비는 청국의 간섭에 진절머리를 앓았다. 그러면서도 2년 뒤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다시 청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3천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온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선의 창고는 비어있고, 국채가 쌓여 그 동안의 개화정책은 성과가 없었다”고 혹평하며 “조선은 못쓰게 된 배”라고 단정했다. 그는 왕 위의 왕처럼 안하무인으로 행세하며 고종 위에서 군림했다. 그렇게 굴욕을 당하였던 고종은 10년 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다시 청국군을 불러들였다. 더군다나 동학군들이 왕을 향해 물러가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고종은 12년 동안 세 번이나 똑같은 패턴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10년 전 갑신정변 후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어느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는 경우 다른 나라도 맞출병을 할 수 있게 <천진조약>을 맺었었다. 고종이 청국군을 불러들이자 일본도 군대를 파견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은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이렇게 고종은 위기의 국면에서 왕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안전에 악수에 악수를 거듭했다.


고종 친정 33년간, 고종은 무엇을 개혁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했던 것인가? 손가락은 ‘부국강병’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고종이 했던 것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았다. 손가락 즉 자신의 권력 강화에 매달리며 민생을 향상시키지 못했고 집권층의 부패를 방치했으며 나라를 예속의 늪으로 끌고 갔다. 




ec75ed399763472d757dee9283422df4_1627393951_8707.png
고종(가운데)과 마지막 대신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개혁, 개혁”의 외침 속에서 민생은 기본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할 만큼 기술과 산업구조가 급변하고, 세계질서와 세계의 패권구도가 변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 사회에는 개혁, 개혁, 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좀처럼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 세계적 요인이 겹친 데다가 코로나19 사태까지 장기화되면서 더 어려워지고 더 불안정해지고 더 내일을 알 수 없게 되고 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보니 청년층은 결혼을 기피한다. 자녀를 갖지 않는다. 중년층은 실직 불안에 떤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접는다. 노년층은 노후준비 없이 맞는 길어진 수명으로 더더욱 불안하다. 삶의 압박 속에서 이혼율은 증가하고 가정은 해체된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며, 자살률은 세계 최고이다.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어디에도 안정감을 가지고 살기 어려운 “답이 없는 시대” “테스형에게라도 물어야 할” 답답한 시대가 되고 있다. 


“개혁!” “개혁!” 외침이 일상화된 이 시대이다. 부동산 문제 해결에 몇 년 사이에 20여 차례나 개혁 조치를 단행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개혁 노력이 국민 삶을 윤택하게 하고, 내일을 기약하게 하고 있는지, 고종의 개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개혁을 외치며 노력하더라도 그것이 국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안정감과 윤택함,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전망을 주지 못할 때 나라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고종 33년 개혁과정이 보여 준다. 







Comments

  1.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