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역사 성경의 전래
성경의 전래
글·사진 이정은
순양함 알세스트(HMS Alceste)호와 호위함 레이어(HMS Lyre)호
(1811년 11월 29일 Painting by Pierre Julien Gilbert)
1816년 이양선, 언어불통 속의 첫 만남
1816년 9월 5일 낯선 이양선 두 척이 충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나타났다. 마량진은 조선시대에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군영이었다. 두 배는 영국 정부가 청국에 파견한 사신 로드 암허스트경(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과 수행원들을 실은 순양함 알세스트(HMS Alceste)호와 호위함 레이어(HMS Lyre)호였다.
알세스트호 함장 멕스웰(Captain Sir Murray Maxwell, 1775~1831)은 영국 왕실해군 장교로서 나폴레옹 전쟁 때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배에 탄 암허스터 경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그 항해 후 인도 총독(1823~1826)이 된 인물이었다. 그를 태우고 중국을 방문한 후 배는 조선 서해안과 류우큐제도를 방문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다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에 들러 유배중이던 나폴레옹을 만나기도 했다. 알세스트호 함장 머레이 맥스웰(Sir Murray Maxwell)과 레이어 호의 바질 홀 함장이 이끄는 두 배는 북경 방문을 마치고 귀환 길이었다. 배는 발해만을 돌아 조선을 발견하고 측량을 했다.
알세스트호 함장 멕스웰
(Captain Sir Murray Maxwell, 1775~1831)
이양선 두 척이 해안 멀리에 정박한 것을 발견한 마량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병졸과 현민들을 동원하여 배
를 나포하려다 배가 커서 불가능하자 정탐차 배를 방문하였다. 이때 성경이 전달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경 전래로 기록되는 이 방문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다.
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젓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중략)’ 첨사와 현감이 (큰)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이때 전달한 책 3권이 영어 성경이었다. 한국인이 처음 성경과 만났던 이 사건은 한국인은 영어를 모르고, 영국 측은 한문이나 한국어를 몰라 소통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알세스트호의 군의관 존 맥레오드(John Mc’Leod)는 영국으로 돌아가 항해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은 <알세스터의 항해-코레아 해안을 따라서-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로 1818년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되었다. 책에서 성경을 전달하는 장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H.M.S Alceste호의 항해(1918)> 책 내지(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알세스트 호의 항해> 중 성경 전달 장면
“그가 맥스웰 선장이 주는 성경 한 권을 받았다. 선장은 성으로 구인하겠다고 겁박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그는 성경을 마치 공식적인 의사 교환의 문건이라 여기는 듯 소중하게 다루며 육지로 가져갔다.(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 to the Yellow sea, along the coast of Corea, and through its numerous hitherto undiscovered islands, to the island of Lewchew;Published/Created, Philadelphia, M. Carey and son, 1818, p.36)”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복건성의
중국인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
1832년 귀츨라프의 성경 전달과 한문을 통한 소통
16년 후인 1832년 이번에는 배 이름이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인 영국 동인도 회사 용선이 7월 25일 보령 앞바다 고대도(원산도란 주장도 있음)에 나타났다. 이 배는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해 2월 26일 마카오를 출발했다. 그 후 중국 연안 항구를 거쳐 7월 17일 황해도 몽금포 부근에 정박(상륙)하였고, 다음날 충청도 쪽으로 남하하여 보령 앞바다에 정박했다.
배는 조선 정부에 통상허가를 요청하고 답을 기다리며 8월 12일까지 18일 동안 머물렀다. 이 배에 의사 겸 통역으로 루터교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가 타고 있었다. 그의 중국 이름은 곽실렵(郭實獵)이며, 중국에서 봉사할 때 중국옷을 입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유태계 폴란드 사람으로 독일에서 출생하여 베를린 야니케 신학교를 나왔다.
그는 타일랜드와 조선을 최초로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이며, 중국에 파견된 최초의 루터교 선교사이다. 1834년 그는 1931년, 1932년, 1933년 3차에 걸쳐 중국 연안을 항해한 일지(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를 책으로 냈다. 또한 그는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때 영국 사절단을 위해 통역을 담당했으며, 묘는 홍콩에 있다.
귀츨라프는 6개 국어에 능통한 선교사였다. 그는 마카오와 홍콩에 있으면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중국어 잡지 <월간 동서(Eastern Western Monthly Magazine)>를 발간하고 있었으며, 중국어로 책을 여러 권 저술했다. 그가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까닭에 이번에는 조선 관리들과 한문 필담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충남 해안에 머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가 관리와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했고, 주민들에게 감자와 포도 재배기술을 전했을 만큼 시간을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주기도문 번역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신호철, 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의 행적, <신앙세계>, 2009. 7) 귀츨라프는 자신이 항해일지에서 조선 백성들이 하층민이라 할지라도 글을 읽을 수 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조선 선교에 대한 희망을 기록으로 남겼다.
귀츨라프가 중국 잡지 <Chinese Repository>에 소개한 한글(1932년 12월).
그는 주기도문을 최초로 번역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백성들은 아주 하층민이라 할지라도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며, 글 읽은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대장이 책들을 받는 것을 보자 너도나도 다가와서 책을 받았다. 이 모습이 우리들에게 종교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 다시 복음을 소개할 다른 방법들을 강구하는 노력을 할 용기를 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치적 장벽을 제거하시어 우리가 이 약속의 들판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하실 것이다.”(Gützlaff, Karl Friedrich August,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F. Westley and A.H. Davis, 1834, p. 441) |
귀츨라프의 말속에는 성경이 번역되면 글 읽기를 좋아하는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예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토마스 선교사의 한문 성경 전파와 순교
1866년은 천주교인에 대한 최대의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다. 조선의 어린 왕 고종의 아버지로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인 대원군이 주자 성리학 문화를 어지럽히는 천주교를 금지하고, 프랑스인 베르뇌(Berneux) 등 9명의 주교와 조선인 천주교인 8000명을 참수한 피의 해였다.
제너럴셔먼호를 타고와 성경을 전한 토마스 선교사
조선의 천주교인 대박해의 소문을 듣고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타고 조선의 서북지방 중심도시 평양으로 들어왔다. 대포를 장착하고 통상을 강요하러 온 그 배에 영국 웨일즈 출신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가 조선 선교의 열망을 안고서 타고 있었다.
1866년 8월 9일 중국 산동성 지푸를 출발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부근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 관리들이 철수를 요구했으나 배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상류로 거슬러 올라 평양 중심부에서 12㎞ 떨어진 평양 만경대 근처 두로섬에 닻을 내렸다. 만경대는 근처에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곳인데, 평양 중심에서 12㎞ 서쪽에 있는 대동강변의 부근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주변의 풍광이 다 보이는 명승지이다.
토마스는 대동강을 거슬러 오는 중간중간 기착하는 곳에서 한문 성경을 배포했으며, 두로섬에서도 100권의 성경을 배포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 두 명이 참외를 조금 가지고 배에 오르려다 체포되어 강둑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쑥섬을 거쳐 한사정(閑似亭) 위쪽에 닻을 내리고 중군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하고는 그를 셔먼호에 억류했다.
9월 1일 아침 셔먼호는 총을 난사하면서 다시 대동강을 거슬러 올랐다. 강변의 사람들이 “우리의 중군 이현익을 돌려주시오!”라고 외치며 돌을 던졌다. 셔먼호는 다시 평양 중심부에 있는 양의 뿔처럼 생긴 양각도에 이르러 정박했다. 이날 이현익이 구출되었다. 그러나 셔먼호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대동강 수심이 얕아져서 셔먼호가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이때 평양감사는 개화파의 지도자 박규수였는데, 철수를 거부하고 관리를 구금하며 대포로 인명을 살상하기까지 하는 셔먼호에 대한 공격을 명했다. 평양 관민들은 작은 배들을 연결하고 그 위에 솔가지를 가득 쌓아놓고 유황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셔먼호로 떠내려 보냈다. 불타는 작은 배들이 셔먼호에 닿자 셔먼호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을 피해 강으로 뛰어내린 선원들은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뛰어 내렸으나,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가 남긴 성경은 단속 때문에 대부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그러나 평양으로 오는 도중 장사포에서 성경을 받은 소년 홍신길(洪信吉), 석정호에서 성경을 받은 김영섭(金永燮)과 김종권(金宗權),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崔致良)이 후에 강서와 평양 널다리골 교회(板洞敎會) 창설자가 되었다.
12세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은 숙부와 함께 9월 3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 성경 3권을 주웠다. 최치량도 주운 성경을 집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여관의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었고, 의주 사람으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S. A. Moffett)과 함께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된 한석진(韓錫晋)의 전도로 개심하여,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되었다. 이때 평양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 장소로 사용했는데, 이 예배소가 평양 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 후 개신교가 정식으로 전파되면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성경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다. 그 후 1885년 개신교가 선교의 허가를 얻어 선교사가 조선에 왔는데, 그 전에 자생적인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 평양 같은 곳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나,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등을 겪으면서 불안에 빠진 조선의 민중들이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서 문명의 빛과 안전을 찾아 대거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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