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Ⅸ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김영삼 정부출범

2022.12.3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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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Ⅸ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김영삼 정부출범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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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신한국 창조’를 주제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선서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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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한 지붕 세 가족 민주정의당의 내각책임제 갈등 

박철언(朴哲彦)은 노태우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다. 1942년생인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던 1965년 그해에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1967년 8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검사가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장군의 국가비상대책위원회에 법사위원으로 파견되어 제5공화국 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그 후 잠시 검찰로 돌아갔다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으로 권력 핵심으로 들어와 전두환 후계자였던 노태우의 심복이 되었다.


그는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고 정책담당 보좌관, 청와대 비서관이 되었으며 곧 민주정의당 제13대 전국구 국회의원, 정무 제1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6공의 황태자’로 불린 그는 전임 전두환 대통령의 영향력을 지우고 노태우를 명실상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1990년 1월 그는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하여 김영삼과 3당 합당을 의논했다. 그는 민주정의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당의 공천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그런 민정계에 김영삼을 능가할 만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다.


내각책임제 개헌 구상은 그런 상황 때문에 나왔다. 만일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면 국회의원을 많이 거느린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노태우와 박철언이 바라는 바였다.


대통령 단임제가 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 후임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에 정치권과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3당 합당으로 몸집을 키운 집권여당 민주자유당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정치집단이 인위적으로 합쳐진 탓에 더욱 복잡했다. 민자당의 김영삼이나 야당의 김대중을 이길 수 있는 대중적 인물이 없던 여당으로서는 내각책임제가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각책임제를 전제로 3당 합당을 했던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는 데 제일 큰 걸림돌은 김영삼이었다.


중앙일보가 1990년 10월 25일자 신문에 “전당대회 직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김종필 최고위원이 내각 책임제 개헌에 합의하고 각서를 만들었다”는 폭로 기사와 함께 합의각서 사본까지 공개했다. 이 폭로는 김영삼을 ‘내각제 개헌’ 합의의 당사자로서 합의에서 발을 빼지 못하도록 압박하고자 한 노태우와 박철언의 작품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김영삼 측은 “합의 문서 공개는 김 대표를 궁지에 몰아넣어 대권을 주지 않으려는 정치공작이다”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국민을 방패로 내세워“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못한다”며 더 나아가 “내각제를 백지화하라”며 공개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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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국무총리



노태우 대통령이나 박철언으로서는 김영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었던 김영삼은 처음부터 그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의 해가 밝자 김영삼은 노태우와 박철언을 다시 강하게 압박했다.


“내각제를 백지화하라. 그렇지 않으면 탈당하겠다!”


노태우와 박철언은 김영삼이 없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1990년 12월 27일 노재봉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었다. 이 인사는 두 가지를 위한 포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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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이 1990년 3월 29일 소련 방문을 마치고 귀국, 동행했던 박철언 정무1장관과

공항을 나서고 있다. 이때부터 YS와 박철언은 치열한 전쟁에 돌입했다. (출처: 연합뉴스)



노재봉은 1990년 3월부터 그해 12월까지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 으로 있으며 내각제 개헌을 지지했다. 내각제로 가면 총리로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내각제 개헌에 실패하면 노재봉 총리를 강영훈 전 총리,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과 함께 민정계의 대선후보로 고려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쉽지 않은 것은 집권자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끝이며 당내에는 김영삼, 야당에는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대중 정치인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민정계의 정권 재창출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노재봉 총리는 취임 이후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등의 재야 민주화세력에 대해 언론을 동원해 좌경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강경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 측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후 여론 악화로 노재봉은 단명 총리로 끝났다. 결국 노태우가 추진하려던 내각제는 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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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정무장관



노태우가 다시 박철언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김영삼은 “박철언에게 후계자를 주면 즉시 반정부 투쟁을 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노태우는 굴복했다. 김영삼은 자신에 맞서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자가 되려고 했던 박태준이나 이종찬에 대해서도 노태우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한국 정치판의 대표적인 킹메이커 및 선거 전략의 대부로 통하던 김윤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물리쳤다.


1992년 5월 19일 민주정의당은 대표최고위원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것이다”라고 김영삼을 조롱하던 사람들은 그의 뚝심에 탄성을 질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두 번째 대통령 선거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비대해진 민주자유당 후보 김영삼의 최대 경쟁자는 통합 야당의 김대중이었다. 민주화 세력의 양대 거두가 이제 한쪽은 여당 후보로, 다른 쪽은 제1야당 후보로 맞붙게 되었다. 여기에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제3후보로 뛰어들었다.


3당 합당으로 이전의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한 지붕 세 가족이 된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뽑았으나 이전의 김종필계(신민주공화당), 노태우계(민주정의당)를 지지하던 국민들은 김영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3당 합당 이전의 기존 통일민주당을 지지하던 국민들이 3당 합당의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남지역 통일민주당 지지층은 김영삼을 지지했지만 수도권의 경우에는 민주당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거나 단기필마로 출마한 참신한 이미지의 신정치개혁당 박찬종에게나 제3당 정주영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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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박찬종은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권 앞에 분열하자 이철, 조순형, 홍사덕, 장기욱, 허경구 등과 함께 끝까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양김씨의 통합을 촉구했었다. 결과적으로 김영삼도 싫고 그렇다고 김대중을 찍기는 더 싫은 보수층이 박찬종이나 정주영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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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치개혁당 박찬종




19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정주영은 역대 정권에 바친 정치자금을 공개하며 정치적 행보를 시작했다. 정주영은 노태우 정권에게 매년 100억을 정치자금으로 바쳤다고 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역대 정부는 재벌로부터 수천억의 정치자금을 받아 선거를 치렀다.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헌납해야 했던 정주영은 스스로 통일국민당을 조직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주일을 영입하는 등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창당 한 달 만에 치른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본인도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정주영은 현대 직원들이 모두 자신을 찍고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만 설득하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 노태우 정권은 총선에서 보여준 현대그룹의 조직력을 경계했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현대그룹 직원들의 부정선거 사례를 들추어 대대적으로 폭로했고 비자금을 폭로하는 등 현대그룹을 압박하여 정주영 선거운동 조직의 손발을 묶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의 도시 울산 같은 곳에서조차 현대의 임직원 수보다 적은 표가 나와 정주영은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선거결과 총 2942만 2658명의 유권자 중 2409만 5170명이 투표하여 81.89%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그중 무효표는 31만 9761표였다. 1위는 여당 후보 김영삼이었으며 김대중은 김영삼에 193만여 표를 뒤졌다. 후보는 후보별 득표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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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 직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 명인데 득표수가 400만 표(정확히는 388만표 정도)라니 우리 당원들은 다 어디에 투표한 것인가”라고 했다 한다. 그 1200만 명 당원수는 억지로 불려놓은 숫자인지라 그것이 그대로 표로 반영되기는 어려웠다.


집권 민주자유당으로서는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김대중이 최대의 적수였기 때문에 호남에 대한 영남의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표를 결집하려 했다. 이 때문에 대선 과정에서 지역감정이 증폭되었다. 영호남 지역감정은 민주화시대의 산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표심은 여촌야도, 즉 농촌지역은 여당을, 도시 지역은 야당지지로 갈렸었다. 따라서 영호남 지역감정이 80년대 이후처럼 심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한 할아버지 김동욱 대에 멸치어장을 다시 일으킨 부친 김홍조는 어선을 10여 척 이상 보유한 부를 이루었다. 그에게 위에 아들 둘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여 김영삼은 사실상 외동아들이었다. 김영삼은 1951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만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9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대중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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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왼쪽)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특히 1979년 10월 YH 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때 당수로 있었으며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다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10월 17일 부산·마산 민주항쟁(부마항쟁)을 촉발했다. 부마항쟁은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연결되어 유신의 종말을 앞당기는데 그가 일정 역할을 했다. 1983년에는 김대중이 국외에 있는 가운데 23일 동안 민주화를 촉구하는 단식투쟁을 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김대중의 국내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를 위한 후보 단일화의 여망을 외면하고 두 사람 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노태우 정권이 탄생하게 했다. 그 후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을 선언하며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마침내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 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었고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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