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Ⅹ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김대중 정부 출범

2023.01.25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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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Ⅹ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김대중 정부 출범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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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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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19일 제14대 대통령에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김대중 민주당 대선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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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19일 14대 대통령선거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캠브리지(cambridge)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있던 

김대중 전 총재의 영국자택을 방문한 노무현 전 의원과 

이강철 당무위원(출처: 노무현재단)



김대중 전 민주당 총재는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8.14%p, 193만 6048표 차이로 패배하자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한반도 통일문제 연구에만 전념하겠다”고 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국민당 정주영 후보도 정계를 은퇴했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표방하고 군내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정관계 요직에서 군 출신을 퇴출했으며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시행하고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등으로 집권초기 지지율이 83%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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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강 성수대교 붕괴현장의 구조작업 모습 (출처: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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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 (출처: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대형 사건사고들이 연속 터졌다. 취임하던 1993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에 이어 1994년 10월 21일 아침에는 서울 한강에 놓인 성수대교 중간이 붕괴되어 통학길의 여학생들을 비롯한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 당하는 사고가 일어나더니 이듬해인 1995년 6월 29일에는 서울 서초동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가 무려 502명, 부상자는 937명에 이르렀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사건사고들로 인해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지지율을 깎아 먹었다.


다른 한편 1980년대 호황 뒤끝에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경제에 깊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부동산과 아파트 건설로 떼돈을 번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철강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보철강을 설립하고 당진에 제철소를 짓기 위해 정관계 로비를 통해 약 5조 7000억 원의 불법 대출을 받았다. 여기에 대통령의 차남이 관련되어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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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계 은퇴 번복 ‘정계 복귀’ 보도 (출처: 한겨레 1995.7.14)



게다가 정태수는 이 돈 대부분을 제철소 건설이 아닌 다른 사업에 투자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보그룹은 5조 원의 빚을 안고 당진제철소는 물론 한보그룹 자체가 도산했다. 한보그룹 부도는 금융권의 자금경색을 가져와 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다른 기업들도 줄줄이 부도가 났다.


김영삼 정부는 임기 말 레임덕이 시작되었고 야당은 이런 여당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전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IMF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6%대로 내려앉은 상태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 국면을 맞게 되었다.


영국으로 가 국내 정치에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던 김대중은 자전적 에세이집 <새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라는 책을 출간했다. 뼛속까지 정치인인 김대중이 ‘인간 김대중’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고자 한 이 책은 65만 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4년 5월에는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대북 문제에 대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국제적으로 알려져 이북에서도 신뢰할 만한 인물의 중재 필요성’을 역설하여 한 달 뒤인 6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및 7월 김영삼-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남북 정상회담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불발되었으나 김대중의 국제적인 안목과 영향력이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호의적인 시선을 받자 김대중은 정계 복귀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먼저 임동원을 실무 책임자로 아태재단을 설립하여 정관계, 산업계 및 손숙, 정한용 등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의 폭을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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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 젊은 시절 한 때




1995년 6월 27일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1960년 4·19 이후 장면 민주당 정권 때 한번 실시했다가 이듬해 5·16으로 중단된 지방자치 선거였다. 김대중은 민주당 지지 선언을 하며 정계 복귀의 앞자락을 깔았다.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제1야당의 지위를 다졌다. 김종필은 3당 합당 후 14대 대선 승리에 기여하고도 자의반 타의반 민주자유당에서 나오게 되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충청도와 강원도에서 승리하여 정국의 변수로 떠올랐다.


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두 달 뒤인 9월에는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하였다. 김대중은 천용택,이동원, 임동원 등 보수 진영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여 보수와 진보 양 진영 표심을 공략했다.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이 있었다. 신한국당 원내 제1당 수성과 150석 이상 확보, 새정치국민회의 개헌저지선 100석 이상 확보, 자유민주연합 60석 이상 확보, 통합민주당 원내교섭단체 구성 의석(20석 이상) 확보를 목표로 하였다. 5공의 색채가 강했던 집권 민주자유당은 신한국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며 민정계와 구 공화계 인사들을 대거 퇴출시키고 김영삼에 대한 반대자와 신진세력을 영입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39석을 차지하여 원내 1당 지위는 지켰으나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특히 충청도 지역에서 대참패를 당했다. 이에 보수 성향의 무소속, 통합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 의원을 대거 영입해서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호남계, 동교동계 인사들은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자 민주당에서 대거 탈당하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정국은 여당 하나에 다수의 야당이 있는 1여다야(一與多野) 구도가 되었다. 민주당은 총선 때 서울과 수도권에서 야당 표 분산으로 고전했다. 겨우 79석을 차지하여 개헌저지선 100석 확보에 실패했다. 정치재개를 선언하고 신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참가한 김대중에게 야권 분열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었고 투표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야권 표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찢어져 신한국당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었기 때문에 신한국당에서는 “여당의 서울 승리의 최대 원군은 DJ다”란 말까지 나왔다. 국민회의는 비례대표(전국구) 선거에서도 1% 가량의 득표율 미달로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14번이던 김대중 총재가 낙선했다.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충청지역을 석권하고 반YS 정서가 강한 대구에서 8석을 차지하며 이들 지역에서 신한국당을 압도하였다. 또한 강원, 경기, 경북 지역에서도 선전하였다. 이로써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하여 제15대 국회는 3당 구도로 재편되었다. 

“큰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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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울공항에서 대국민 인사를 하는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은 자신에 대한 야권분열 책임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새정치연합의 분위기를 다잡았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선언했던 정계은퇴를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정계복귀에 무리없이 성공한 것에 안도했을 것이다.


여당 신한국당은 1997년에 들어 한보그룹 부도에 이어 기아자동차도 부도가 나고 11월에는 IMF 긴급 구제요청을 하는 사태가 이어지는데도 임기 말 김영삼 정권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쏟아졌으며 대기업들은 줄줄이 부도사태를 내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7%까지 폭락하였다. 반면에 김대중은 ‘경제를 아는 대통령감’ 이미지로 대선후보 중 지지율 1위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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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

집권여당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박찬종 등 9룡이라 부르는 9명이 당내경선에 도전했다. 1997년 7월 최종경선에서는 대법관 출신이자 김영삼 정부의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회창과 다선 국회의원과 경기지사를 역임한 이인제가 격돌한 끝에 이회창이 선출되었다. 경제가 파탄 나고 대통령 지지율이 7%를 찍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1997년 7월의 지지율 조사에서는 이회창은 40.4%로 26.6%의 김대중을 크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회창은 군사정권 시절 군사정권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대쪽판사라는 깨끗하고 강직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국무총리로서 원칙을 강조하며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다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을 빚으면서 더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회창의 두 아들이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권층의 병역기피에 민감한 국민 정서상 그의 깨끗한 대쪽 이미지를 망가뜨렸다. 이후 그해 8월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15%까지 곤두박질쳤다. 야당의 집요한 네거티브 전략이 크게 효과를 발휘했다. 이회창은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순과 합당하고 당 총재 자리를 조순에게 주며 11월에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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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이인제 출마, 보수표 분열

병역비리로 이회창의 인기가 추락하자 이회창과 경선 끝에 패배한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한 뒤 1997년 10월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로써 여당 표가 이회창과 이인제로 크게 분열되게 되었다.


DJP연합의 김대중과 김종필

김대중은 호남지역에 공고한 지지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전라도에 국한된 아성이었다. 충청권을 잡지 않고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당선될 경우 김종필에게 총리자리를 주겠으며 집권 후 내각제 개헌을 통해 총리의 권한을 강화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1997년 11월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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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1997년 12월 18일 실시되었다. 주요 후보를 중심으로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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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48세 때 대권에 도전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제13대,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3번 실패 후 4번째 도전으로 성공했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 표차를 합치면 57.94%로서 보수 진영이 과반수이상 득표로 넉넉히 김대중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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