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XI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노무현 대통령

2023.02.2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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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XI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노무현 대통령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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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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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

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출처: 중앙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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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이틀 뒤인 6월 17일 김대중 대

통령이 이회창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해 악수를 하고 있는 모

습 (출처: 중앙SUNDAY)



5년 단임 대통령제의 공헌과 한계

제15대 대통령으로 야당 출신 김대중이 당선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큰 진전이었다. 그전까지는 역대 권력자들이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입맛에 따라 개정해온 까닭에 헌법이 누더기가 되었다. 그런 일이 사라지고 이후 정권교체가 반복하여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계 또한 있었다. 그 하나는 국가의 중장기 비전과 목표가 사라졌다. 정권은 5년 임기 내 효과가 나는 일만 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른 한편 임기 중반을 지나면 레임덕이 와서 정책추진이 어려웠다. 김영삼 정부 말기의 IMF라는 국가부도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라할 것이다.


제16대 총선과 여소야대 정국

김대중 정부 중반인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이 있었다. IMF 이후 국회도 국민과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지역구 26석을 줄여 국회의원 정수는 273명이 되었다. 선거를 3일 앞둔 2000년 4월 10일 김대중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발표했다. 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김대중 정부 실세 박지원 장관이 “이것으로 총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발표를 밀어 붙였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총선용 신북풍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총선 결과 전국 선거인수 3348만 2387명 중 1915만 6515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57.2%를 기록하였으며 이회창이 이끄는 한나라당이 39.0% 득표로 133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집권 새천년민주당도 17석이 증가했으나 35.9% 득표로 98석을 얻었다.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9.8% 득표로 33석을 잃고 17석으로 주저앉아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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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왼쪽)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출처: 뉴시스)



그러나 어느 당도 과반(137석)을 차지하지 못한 정국이 되었다. 선거 후 여권은 무소속 영입, 자민련과의 공조 복원 등으로 인위적인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다. 그러나 2001년 들어 자민련과의 연대가 깨지고,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으로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는 한나라당이 140석 넘는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여소야대 정국 하에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까지 세 아들 모두 이권청탁 등으로 구속되는 등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는 가운데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맞게 되었다.


노무현의 출현

노무현이란 지도자의 출현은 한국 정치에 이변의 연속으로 꼽힐 것이다. 그는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육군 상병으로 제대한 후 사법시험 도전 9년 만인 1975년 3월 제17회 사법시험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를 잠시 거친 후 자신의 이름으로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2년 문재인 변호사와 손잡고 노무현 문재인 법률사무소로 개편했다.


부산의 맹주 김영삼은 노무현의 인권 변호사 활동을 눈여겨보고 1988년 통일민주당 제13대 국회의원 부산 동구에 공천하였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초선의 노무현은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따지는 모습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계 정당으로 옮겼다.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기 어려운 부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지지자들은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우리 정치사에 처음으로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약 7개월 동안 제6대 해양수산부장관(2000. 8. 7~2001. 3. 25)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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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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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발표하는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민주정의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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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초선의원 노무현의 ‘제142회 임시국회 첫 대정부질의’ 연설 모습 (출처: (재)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새천년민주당 경선

새천년민주당은 경선 규칙을 바꾸었다. 당원들만 참여했던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을 처음으로 당원:국민을 50:50으로 하는 ‘국민 참여 경선’을 도입하여 2002년 3~4월 두 달 동안 각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여 지역별 후보자 선거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각본 없는 16부작정치 드라마가 되어 무명의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상대는 경기지사 출신 다선의원 이인제, MBC 인기 앵커 출신 정동영, 김대중 정부 비서실장 출신 영남권 김중권, 민주화투사 김근태, 동교동의 주진 한화갑, 전북지사 유종근 등이었다.


경선 초반 이인제가 유력했다. 그러나 경선을 시작하면서 김근태가 동교동계의 실세 권노갑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사퇴하자 권노갑의 지원을 받던 이인제의 조직이 위축되어버린다. 게다가 한나라당 이회창에게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계속 밀려 정권 연장을 희망하는 새천년민주당 지지층 입장에서는 불안했다.


제주(한화갑 1위), 울산(노무현 1위)에 이어 세번째 지역 광주광역시의 경선이 최대 분수령이었다. 광주가 기반인 한화갑과 대세론 이인제가 1위를 두고 다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때까지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어떤 후보가 나오더라도 상대 진영 이회창을 이길 수 없는것으로 나왔는데,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노사모들이 이 여론조사를 보도한 신문을 대량 구입하여 광주지역에 뿌리는 등 열성적으로 지지운동을 벌였다. 결국 예상을 깨고 노무현이 1위, 이인제 2위, 한화갑 3위로 이변을 연출했다. 노무현 바람, 즉 노풍(盧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각 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한나라당은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고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제15대에 이어 재수 대통령 후보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당 대표를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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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2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진영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노무현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을운동

회’ 모습.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사모 회원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2002년 2월 28일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5월 17일 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6·13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하여 동력을 잃고 대선 한 달 전 한나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전두환 정부의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장세동도 무소속 후보로 출마 선언을 했다가 당선 가능성이 없자 사퇴했다.


정몽준 의원 출마

정몽준은 현대의 본거지 울산을 지역구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이며 대한축구협회장이었다. 2002년 그해는 한일 월드컵의 해였다. 정몽준은 월드컵 유치를 해내고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여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어 내어 일약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을 깎아 먹었다.


당내 굴러온 돌과 같은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의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 대신 정몽준을 영입하여 대선 새판을 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10월 들어서자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었다.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일부는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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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13일 민주당 노무현 후보(왼쪽)와 정몽준 대표가 대전시 중구 문화동 서대전광장에서 열린 거리유

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판세는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2위 싸움을 벌이는 1강 2중 구도로 재편되어 정몽준 캠프로서도 하루 빨리 단일화를 성사시켜야 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 큰 양보를 하는 노무현 후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노무현 후보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리서치앤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정몽준 후보는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노무현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경쟁자였던 이인제 최고위원이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하고 김종필의 자민련에 입당하여 총재 권한대행이 되었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할 계획이었다. 김종필 총재가 이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민련은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했다.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 정몽준도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노무현 후보의 안보관을 문제 삼아 민주당과 선거공조 파기,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에서 기다렸지만, 정몽준 대표가 끝내 만나주지 않는 모습이 전파를 타며 진보진영이 당선 가능성 없는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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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1201만 4277표(48.91%), 이회창 1144만 3297표(46.58%), 권영길 등 기타 후보 4.51%로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출처: 뉴시스)




선거의 날은 이렇게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밝았다. 선거인수 3499만 1529명에 총 투표자수 2478만 4963명, 무효 투표자수 22만 3047명로서 투표율은 70.8%였다. 선거 결과 후보자별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 노무현 1201만 4277표(48.91%), 이회창 1144만 3297표(46.58%), 권영길 등 기타 후보 4.51%로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치판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시대가 끝나고 대한민국 정치계의 본격적인 세대교체, 노사모의 등장, 인터넷 정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2007년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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