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호 역사 대통령 선거의 역사 12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이명박 대통령

2023.04.2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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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의 역사 12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이명박 대통령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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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 경선 당시 악수하는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 (출처: 뉴시스)


노무현 대통령 집권 말 상황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은 집권 5년(2003.2.25~2008.2.24) 동안 기성 정치권과 재벌, 언론, 서울 중심의 수도권이라는 ‘기득권’과 싸웠다. 그는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참여하여 여당을 재편했다. 재벌과 언론을 규제하여 거대 재벌과 거대 언론의 영향력을 제어하고자 했다. 수도권에 집중된 부와 권력의 지방 분산과 수도를 충청권으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는 등 다방면으로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정책과 행보, 격정적인발언 등으로 사방에서 많은 반발을 샀고,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4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중립의무 위반이라며 선거관리위원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대통령은 사과를 거부했다. 이에 조순형 대표의 새천년민주당이 탄핵발의를 했다.한 나라당과 자민련이 동조했다. 탄핵소추안은 국회에서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이 되었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야 3당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다. 그 여파를 타고 그해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진보세력이 다수당이 된 국회가 출범하였다. 그 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하여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신행정수도법은 2003년 12월 29일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되고, 2004년 8월 11일 국회에서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 그러나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고,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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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물과 악취가 넘치던 청계천 복개공사. 1958년 착수하여 1976년에 청계고가도로까지 완공되었다. 
2003년부터 이를 헐고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한편 노무현 정부는 국익의 차원에서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였으나 지지자들이 “개혁적 노선에서 이탈”이라며 등을 돌렸다.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재임 5년 동안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좌파라는 비난을,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2005년 7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에게 영호남 지역구도가 극복을 위해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총리지명권, 조각권 등을 한나라당이 행사하는 대연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박근혜의 한나라당은 거부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도 이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이 제안은 열린우리당과 진보진영 내부의 자중지란만 초래하고 결실 없이 끝났다.


그리하여 집권 4년차였던 2006년 12월 6일 역대 대통령 중 5.7%대의 가장 낮은 지지도를 기록하였다. 이는 임기 말 IMF를 초래하여 역대 최저치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8.4%보다 2.7%포인트 낮은 수치였다. 이런 상태에서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맞게 되었다.


“청계천에 물만 흘러라”

현대건설 회장 출신 이명박(李明博, 1941.12.19~)은 건설회사 CEO 출신으로 힘든 일에는 잔뼈가 굵어 밀어붙이기, 즉 추진력의 일등 선수였다. 그는 2000년 민선 3기 제32대 서울특별시장을 할 때 청계천 복원사업을 했다. 개발시대 산물인 청계천 고가도로의 안전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었고 생태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때였다. 청계천 일대는 공구상가, 피복상가 등 대규모 상가들이 이어져 있고, 생업이 달려 있는 20만 소상공인들의 이주 설득과 보상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과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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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1일 당시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명박 시장 (2003.7.1)



이명박 시장은 상인들에게 복원공사로 인한 영업손실 보상이나 착공 연기는 일절 거부하고, 오직 대체부지 선정 및 지원만을 제시하며 밀어붙였다. 이명박 시장은 무려 4000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2005년 10월 1일 청계천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이명박은 추진력으로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시중에는 “청계천에 물만 흘러라”며 그의 차기 대권을 전망하는 말이 돌았다.


이명박 시장은 또한 수도권 광역화에 맞춰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 개편했다. 버스노선 조정은 업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었다. 이명박 시장은 버스 준공영제 도입, 번호 체계 개편, 노선의 직선화, 버스 중앙차로제, 도심 도로 중앙에 환승정류장 설치, 스마트카드 시스템 구축으로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간 무료 환승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에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집단 거주지에서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李忠雨)는 결혼 후 일거리를 찾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목장의 인부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돌아와 포항에 정착하여서도 아버지는 목장에서, 어머니는 과일행상을 했지만 가족들은 단칸방을 면하지 못했고,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웠다. 어린 그도 성냥, 김밥, 밀가루 떡을 팔아 살림을 도왔다.


포항중학교 시절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담임의 설득에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하여 밤에는 학교에 다니고, 낮에는 수레를 끌고 뻥튀기, 과일행상 등으로 생활비를 보탰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노무자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일당 노동일을 했다. 그러던 중 대학생이 되어 보고 싶어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하여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이태원 시장에서 환경미화원 자리를 구해 새벽에 학비를 벌고 낮에 학교를 다녔다.


3학년 때 상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6·3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6개월간 복역하고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시위전력 때문에 졸업 후 취업이 되지 않았다. 이명박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취업을 막지 말아 달라고 편지를 써서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현대건설에서 꼭두새벽에 일을 시작하는 정주영 회장보다 더 일찍 출근하여 정주영 회장의 눈에 들었다. 5년 만에 이사가 됐고 12년 만인 1977년엔 37세 나이로 현대건설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 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그는 국민적 인물이 되었다.


1992년 1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이명박은 현대를 떠났다. 그도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이어 15대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시장이 되어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 시스템 개편 등으로 일을 해내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열린우리당의 위기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 4·15총선 원내 과반을 이룬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 첫 정기국회가 열리자마자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개혁법’등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한나라당은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이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다. 결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은 폐지하지 못했다. ‘언론관계법’은 ‘조중동’의 독과점을 막겠다는 애초의 취지를 살리기 못하게 되는 등 개혁입법들이 여야 간 적당한 타협으로 ‘누더기 법’이 되고, 국정 혼란과 노무현 정부 및 열린우리당의 개혁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그 여파로 열린우리당은 2005년 재보궐선거 2회(4·30과 10·26), 2006년 5·31 전국동시지방선거, 7·26과 10·25 재보궐선에서 연전연패했다. 2005년 4월 30일 재보궐선거는 국회의원 6, 기초단체장 7, 광역의원 10, 기초의원 21명을 뽑는데,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5, 무소속 1, 기초단체장은 한나라당 5, 새천년민주당 1, 무소속 1, 광역의원은 한나라당 8, 새천년민주당 1, 무소속 1로 한나라당에 완패했다. 그해 국회의원 4석을 뽑는 10월 26일 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에서 4명이 당선되어 다

시 완패했다.


2006년 5월 31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광역단체장은 전북 한 곳만 얻고 참패를 당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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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6일 재보궐선거에서도 국회의원 4명 선출에 한나라당 3, 민주당 1로 참패했다. 그해 10월 25일 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 부진이 부각되어 박근혜에게 타격이 되었다. 2년 동안 재보궐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연전연패를 당한 열린우리당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맞게 되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 선출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2007년 열린우리당은 다시 분열을 시작했다. 1월 22일 임종인 의원 탈당을 시작으로 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했다. 2월 6일에는 23명, 6월에는 16명이 추가 집단 탈당하여 152석의 제1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73석으로 줄어들었다.


열린우리당 탈당의원들은 중도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시민단체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과 2007년 8월 5일에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했다. 13일 후인 8월 18일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을 공식 의결하여 흡수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은 의석수 143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2007년 1월 범여권 유력 후보 고건 전 총리가 대통령후보 대열에서 기권, 하차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그해 9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국민참여 경선을 했다. 유시민, 손학규, 한명숙, 이해찬이 출마했다. 당초 손학규가 유리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동영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친노진영은 한명숙이 이해찬을 지지하며 사퇴하는 등 단일대오를 구축하려 했으나 인기 없는 노무현 정부와 차별화를 강조한 정동영이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정동영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온 후 17년간 MBC정치부 기자 등을 거쳐 MBC 뉴스데스크 앵커로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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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후보 민주평화당
대표 시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한나라당 내 이명박과 박근혜의 경쟁은 치열했다. 초반에는 박근혜가 앞서는 듯 했다. 박근혜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역풍으로 당이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 때 한나라당 당대표에 선출되어 ‘천막당사’에서 제17대 4·15 총선을 지휘했다. 박근혜의 지도력으로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에서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건져 한나라당을 구해냈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으로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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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2005년 2월 10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 10월에는 제1차 핵실험을 했다. 안보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면서 진보보다 보수, 여성보다 남성인 이명박의 지지율이 1위로 올랐다. 2006년 12월 말 45.6%의 지지율을 기록하여 당내 경쟁자 박근혜 전 대표와 여권의 고건 전 총리를 앞섰다. 그러나 이명박에게는 아픈 곳이 있었다. BBK 문제, 도곡동 땅 문제 등이 아픈 곳이었다. 당내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검증공방이 계속되자 그해 여름 이명박의 지지율은 34.3%까지 떨어졌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은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렀다. 이명박은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박근혜에게 모두 패했지만, 전화상 1표를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앞질러 2위인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 후보가 승복했다.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으나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한 안보국면, 본선에서 노무현정부의 경제 실정을 강조하고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 표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시장 경험이 있는 이명박이 더 유리하다고 일반국민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경선 승리 후 이명박은 10월초 여론조사에서 55.4%라는 높은 지지율로 1위를 기록했다.


이회창의 출마 선언과 각 당의 후보 선출

2007년 11월 7일 대통령 후보로 2번이나 출마했으나 낙선한 전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의 지지율이 단숨에 20%를 넘으면서 2위에 올랐다. 이명박 후보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BBK 사건 핵심인물 김경준이 귀국했다. 지지율은 34.7%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2월 5일 검찰은 이명박 후보의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BBK 실소유주, ㈜다스 실소유주 의혹 모두 ‘무혐의’라고 결론지었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전 당 대표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당은 이인제 의원을, 창조한국당은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를 각각 대선 후보로 지명하였다. 경제공화당에서는 허경영이 후보로 나왔다. 


이명박의 제17대 대통령 당선

2007년 12월 1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49% 득표로 26%를 얻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15%를 받은 무소속 이회창을 제치고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기호 2번 이명박 후보가 기호 1번 정동영 후보를 득표율 차이 22.53%p, 득표차는 531만 7708표로 제6공화국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다 득표차였고, 두번째 정권교체였다. 이명박과 이회창 표를 합치면 보수진영 표가 60%를 넘었다. 투표율은 62.9%로 역대 최저였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은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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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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