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호 역사 어느 원폭 피해자 이야기
어느 원폭 피해자 이야기
글 이정은
히로시마에 떨어지는 원자폭탄
최근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극장가에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Edward Nolan) 감독의 블록버스터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 상영 중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사업 ‘맨해튼 계획’을 총지휘한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다룬 전기영화다. 최근 북핵, 원전,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우크라이나 전쟁, 얼마 전의 히로시마 G8정상회의 등으로 계속 핵문제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데, 이 영화가 다시 핵 문제에 우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지난 호에서 원폭 투하 이야기를 했었다. 이번 호에서는 한 원폭 피해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그날 폭심에서 2㎞ 이내에 있었다. 그런 경우 거의 대부분 1년 이내에 사망하거나 살아도 중환자로 평생 병상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특이한 사례였을 것이다.
김정렴 비서실장
주인공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9년간이나 청와대 최장수 비서실장을 했던 김정렴(金正濂, 1924. 1. 3~2020. 4. 25)씨다. 그분이 생전에 필자에게 회고록 두 권을 보내 주신 일이 있었다. 하나는 <아, 박정희 - 김정렴 정치 회고록->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경제정책30년사-김정렴 회고록->이다. 그중 뒤의 책 제1부의 제목이 ‘출생에서 원폭세례까지’였다. ‘이 분이 원폭과 무슨 관계?’라는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분이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였다.
김정렴은 서울 출신으로 큐슈의 온천도시 벳부 가까운 오이타(大分) 상고에 진학했다. 3학년 때인 1944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정렴도 학병 또는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게 될 상황이 되었다. 이때 속성 장교양성 과정인 특별갑종간부후보생제도가 새로 생겼다. 김정렴은 하사관 계급장을 달고 예비사관학교 교육을 받는 1년간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거기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 사이에 학교는 졸업식을 하고 조선은행에 취직도 되었으나 1944년 10월에 입교를 했다.
전쟁 전의 히로시마 역
사이판이 함락되고 전황이 계속 악화되자 1년 과정이 9개월로 단축되어 45년 6월 말 구마모토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히로시마 주고쿠 군관구사령부 오카야마 연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250명의 견습사관이 연병장에 모여 있었는데 B29 한 대가 하늘에서 급상승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강렬한 황백색 광선이 번쩍했고,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 동시에 불덩어리가 등에 붙은 듯 하더니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
“소이탄이다, 대피, 대피!”
소이탄은 일정 지역에 급속한 화재를 일으켜 인원이나 시설에 피해를 주는 폭탄이다. 부대원들은 훈련받은 대로 소리치며 지면에 몸을 굴려 옷에 붙은 불을 끄고 방공호로 달려갔다. 그러나 폭탄은 한발뿐으로 그후 계속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졌다. 한참 지난 후 서서히 밝아졌는데, 온 시내가 불에 탔고 그의 등짝에도 불이 붙었으며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는 눈, 코, 입만 남겨놓고 얼굴, 후두부, 목의 피부가 떨어져 나갔고 양손에도 화상을 입었다. 새끼손가락은 살점이 날아가 뼈만 앙상하게 보였다.
견습사관 전원이 부상을 입었고, 전원 소사 또는 질식사할 상황인데, 지휘관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다. 선임견습사관들이 모여 공동책임을 지기로 하고, 지시를 내렸다.
“각자 자유행동으로 피신했다가 오카야마로 원대복귀하기 위해 역에서 가까운 동연병장에 집합한다!”
같은 내무반에서 옆에 있었던 동료 견습사관 히데하라 마코토(日出平誠)가 가장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김정렴은 동료를 부축
하여 안전지대로 피신시키고 돌보아 주었다. 불덩어리와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속에서 뒷처리를 끝내고 오카야마 군병원에 입원했다. 며칠 지나 얼굴화상은 거의 나았으나,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2~3일 만에 완전히 빠졌다. 잇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출혈, 각혈 사혈과 고열이 계속되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군의관 간호원들은 거의 귀향해 버리고병 원은 마비되었다. 환자들도 살기 위해 각자 알아서 귀향했다.
오카야마 군병원 기능이 마비되어 치료는 물론 오갈 데조차 없이 난감해 있을 때인 9월 중순 어느날 부상 동료 히데하라가 아버지와 함께 오카야마 군병원으로 찾아왔다.
“우리 고향집으로 가자. 가서 치료를 하고 낫는 대로 귀국하거라.”
“히데하라는 네가 생명의 은인이고, 지금도 두려움 때문에 너와 같이 가지 않으면 집에도 가지 않겠다며 한사코 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히데하라와 그의 아버지가 간곡하게 말했다. 히데하라의 집에 가니 부모님과 온 식구들이 아들과 아들 생명의 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히데하라네 집은 히로시마에서 동쪽으로 약 150㎞ 떨어진 오카야마 산간 오지에 있었다. 부모님은 닭 3000마리로 양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자전거에 닭과 달걀 꾸러미를 싣고 읍내에 가서 쌀, 과일, 약품, 비타민 이런 것들과 바꾸어왔다. 닭을 고아 끼니마다 먹였다. 원폭 피해자들에게 영양보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한다.
원폭이 투하된 후 폭풍과 화재가 뒤덮은 거리의 사람들
읍내에 오카야마 의전을 나온 60대 의사가 있었는데, 친구 아버지 부탁으로 매일 수십리를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진료를 했다. 그 의사는 환자의 피를 뽑아 혈청을 만들고 그 혈청을 다시 주사하는 치료를 매일 해 주었다. 방사능으로 골수가 상해서 조혈기능이 잘 안 되는 것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의학전문학교 시절에 배웠다 했다.
둘은 사랑채에 누워 매일 쌀밥, 닭국, 계란, 과일을 먹고 매일 혈청주사를 맞았다. 병세가 호전되어 갔다. 몇 달 지나는 동안 손가락 끝마디의 살이 날아간 것 외에 거의 상처가 다 낫게 되었다.
병원에 있을 때였다. 데리고 있던 조선인 일등병이 조선으로 귀환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혼란기였고, 언제 현해탄을 건널지 알 수 없는 때였다. 돌아가는 조선인 부대원에게 편지를 적어 보내 부모님께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편지를 받은 가족들은 히로시마 주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 사람들이 매일같이 죽어 나가며 아들도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가족회의를 열었다.
“뼈라도 찾아 고향에 묻어주어야지!”
큰형을 일본에 보냈다. 형은 오카야마 군병원을 찾아가서 수소문 끝에 히데하라의 집에 요양하고 있는 동생을 찾았다. 가족들은 히데하라가 좀 더 회복될 때까지 김정렴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지만, 히데하라 어머니는 “어떻게 우리 생각만 해요. 가족들이 걱정하니 하루라도 빨리 가게 해요”라고 했
다. 부모님 계신 경성으로 돌아왔다.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가지
그는 규칙적인 생활이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조선은행은 1950년 5월 <한국은행법>이 공포되고, 6월 12일 한국은행으로 되었다. 원폭 후유증으로 하루 5~6회 설사하는 일이 2~3년간 계속되었고, 5~6년 지나서야 하루 2, 3번 정상적인 변을 보게 되었다. 머리는 흑인들의 심한 곱슬머리같이 나더니, 그 다음에는 웨이브 심한 파마머리, 그리고 4~5년 지나서야 정상 모발이 나왔다. 화상 흉터는 오카야마 군병원에 있을 때 일본 의료진이 개발한 홍파2호라는 흉터 치료 정제를 오랫동안 복용한 덕택인지 새끼손가락을 제외하고 흉터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나았다.
1954년 여름 한국은행에서 1년간 미국 연수 다녀오는 길에 히로시마에 들러 미국인들이 피폭환자 치료와 연구를 하는 원폭피해자 병원(ABCC, Atom Bomb Casualty Clinic)에 검진을 받으러 찾아갔다.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해요.”
병원 접수처의 말이었다.
“한국인으로 미국 왔다 귀국길이니 특별히 빨리 보아 줄 수 없나요?”
사정 이야기를 해도 규칙상 순서대로 할 수 밖에 없다면서 “성명, 주소, 연령 등과 피폭 당시의 위치, 병력, 현 병세 유무 등을 기록하세요”라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히로시마성 바로 뒤 교육대’
김정렴씨가 피폭 당시 위치를 기재하는 것을 보던 일본인 간호원이 급히 미국인 간호원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미국인 간호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좀 기다려 보세요”라고 했다.
얼마 후 미국인 의사 2명이 오더니 교육대에 있었던 사유, 부대명을 묻고는 “즉시 검진해 주겠다”고하며 목욕을 시키고 흰 가운을 입힌 후 내·외과는 물론 안과, 치과, X-선, 대소변, 혈액, 침까지 수거하여 검사한 후 다음날 아침 다시 와 달라 했다.
다음날 아침에 갔더니 여러 의사가 모여 있었다. 원장이 말했다.
“교육대가 폭심에서 2㎞ 이내에 있었고, ABCC병원 개설 후 당신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피폭되어 검진 온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인데 그 사람은 아직도 중환자로 입원 중에 있습니다. 별 자각증세 없이 자기 발로 걸어서 내원한 사람 중에서 당신이 폭심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각 의사들이 전문분야 별로 본인이 겪은 병세에 대해 철저히 질문하며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대단히 운 좋은 생존자라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한 달 후 두툼한 검진보고서가 한국으로 날아왔다. 세브란스 누구 박사가 당신을 담당할 것이며 피폭 후유증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비행기 표를 보내 ABCC병원에 입원 치료를 해 주겠다는 약속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증세는 없었다 한다.
일본인 친구 부모님의 지극정성 영양보충과 간호, 오카야마 산골 오지 의사의 진료와 혈청주사가 그를 살려 주어 후에 대한민국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게 했던 것 같다.
위) 히로시마 폭심에서 1㎞ 떨어진 곳에서 열에 탄 희생자. 아래) 원자병 환자
한편 귀국 후 히데하라에게 안부와 감사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해방 후의 혼란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1946년 봄 조선은행 발권부에서 일할 때 일본은행 본점 검사역이 조선은행에 와서 함께 며칠 일을 하게 되었다. 돌아가는 그 직원 편으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머니가 히데하라 어머니께 보내는 감사의 금반지를 전했다. 얼마 후 일본은행 검사역은 군사우편으로 친구 여동생의 편지를 보내 주었다.
“오빠는 헤어진 후 병세가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다 1945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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