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호 역사 고대로부터 사용된 통신수단 봉수와 역마Ⅰ
고대로부터 사용된 통신수단
봉수와 역마Ⅰ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장수 봉화봉 봉수대 유적
봉수(烽燧)
봉수와 역마(驛馬)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국가의 수도와 국경 지방간에 사용된 통신수단이다.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역마는 말을 이용하여 육로로 전령이 문서 등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봉수는 역마나 인편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는 신속한 기능 때문에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나 지방의 민란 등 매우 급한 민정상황을 상급기관인 중앙 정부에 연락하는 통신수단이다. 따라서 봉수제는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된 봉수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이지만 군사적 목적으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마주보이는 산성이나 높은 산꼭대기에서 횃불과 연기로 신호하여 긴급한 사태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봉수 유적들이 있다.
봉수에 대한 최초 역사 기록은 중국 주(周)나라 때인데 주나라 유왕(기원전 781~771)은 절세미녀인 포사라는 후궁의 일화에서 봉수에 대한 내용이 기재돼 있다. 포사는 잘 웃지 않아 왕의 애간장을 태웠는데, 어느 날 여산의 봉화대에 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이 났을 때만 피워야 하는 봉화가 아무 일도 없는데도 피어오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 봉화에 놀란 중국 각지의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호경에 부리나케 모였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알고 다들 어이가 없어 화를 내고 철수하였다. 그런데 포사가 보기에 그 사건이 꽤나 재미있어서 왕과 제후 앞에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 후 유왕은 포사를 웃기게 하려고 봉화를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올리게 했으며 이런 일로 제후들이 봉화가 왕과 포사의 장난임을 알고 다시는 출병하지 않았다.
완주 탄현 봉수대
장수 태평 봉수대
있어서 왕과 제후 앞에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 후 유왕은 포사를 웃기게 하려고 봉화를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올리게 했으며 이런 일로 제후들이 봉화가 왕과 포사의 장난임을 알고 다시는 출병하지 않았다.
그 사건 얼마 후 오랑캐 서융이 침략함으로 다급해진 유왕은 봉화를 올려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제후들이 장난으로 알고 출정하지 않아 유왕이 아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오랑캐인 견융족에 의해 붙잡혀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는 봉화가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전한(前漢)시대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그 방법이 점차 발달하여 당나라시대에는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유사>에 가락국 수로왕이 인도의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하여 유천간(留天干)을 시켜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면 봉화로써 통지하게 하라고 한 기록이 있는데 일반적 의미의 봉화임에 틀림이 없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 27일에 구간 등이 조회 때 왕께 아뢰었다. (중략) 유천간에게는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 사실을 보고는 대궐로 달려 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것을 듣고서
기뻐하였다.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千等朝謁之次, 獻言曰, - 중략 - 遂命留天干,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站,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 先舉火於島上, 則競渡下陸, 争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關奏之,上聞欣欣,)”
<삼국사기>에도 백제 온조왕 10년조에 ‘봉현(烽峴)’ ‘봉산(烽山)’과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나타난다. 최근 전북 완주군과 장수군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유적인 침령산성과 함미산성 부근 봉우리에서 가야시대의 봉수터인 완주 탄현 봉수대와 장수 봉화봉 봉수대 유적이 발굴되어 삼국시대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처음 확인되었다. 이러한 역사기록을 살펴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봉수제의 확실한 출발은 고려 중기로 보아야 한다.
고려 인종 1(1123)년에 송나라 사신 노윤적과 함께 고려에 왔던 서긍은 그의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봉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송나라의 사신들이 배를 타고 흑산도에 도착하면 언제나 야간에는 항로의 주변에서 산봉우리에 있는 봉수소의 불을 발견할 수 있었고, 봉화는 순차적으로 밝혀서 임금이 있는 왕성에까지 도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흑산도에서 왕성까지 봉수제가 실시되었음은 알 수 있다.
역제(驛制)가 고려 성종과 현종 대에 중앙집권 과정에서 확립된 사실에 비추어 봉수제도가 역제와 함께 고려의 성종∼현종 연간에 확립되었으며 고려 말에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봉수제를 강화하였다. 의종 3(1149)년에 봉수의 거화수(炬火數: 횃불을 올리는 수)를 규정하였고 봉수의 격식이 야화(夜火: 밤에 올리는 횃불)와 주연(晝烟: 낮에 피어 올리는 연기)으로 구분하였으며, 적과 접근하고 있는 변경지역과 해안지방의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서 거화수를 정하였다.
국경의 중요한 군사정보는 그 정세의 완급에 따라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거화법에 따라 전보되었다. 고려시대는 1150(의종 4)년에 규정된 봉수식에 따라 4구분되어 거화되었다. 야화와 주연은 평상시 1거, 연방의 위급사태 때는 2거, 적이 침입하여 전투가 임박할 때는 3거, 적과 아군이 접전 중에는 4거를 올렸다.
조선왕조는 모든 문물제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이후 봉수제 역시 고려시대의 것을 이어받았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에 이르러 이미 봉수제가 실시되고 있음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1406(태종 6)년 12월에 자주(慈州) 사람 조수일 등을 거제현 봉수군졸 배치하였다고 하고, 1408년 1월에는 연해경비를 강화하고 만호(萬戶)와 천호(千戶) 등을 단속할 목적으로 해도찰방(海道察訪)의 책임자를 지방 삼도(三道)에 보내면서 봉화로써 해상을 관찰하는 것이 군사상 긴요하므로 만약 이를 소홀히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중히 다루라고 지시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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