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호 역사 고대로부터 사용된 통신수단 봉수와 역마 Ⅲ

2024.01.07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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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사용된 통신수단

봉수와 역마 Ⅲ 


​글·사진 이명우 운룡도서관·운룡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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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봉수대



봉수 연대(烟臺)의 설치 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되며 시설과 정원 및 처벌규정에 각각 차이가 있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고, 연변봉수는 해륙변경(海陸邊境)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 호칭한 것으로 그 임무수행이 가장 힘들었다.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수적으로 대다수였다. 이 밖에 직봉(直烽)·간봉(間烽)이라는 구분이 있었으나, 이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의 약칭으로서 봉수대 자체의 구분은 아니고 그 봉수가 위치한 선로상의 구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수제는 점점 복구되었으며 특히 북쪽에서 전해지는 북로봉수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였다. 조정에서는 봉수군의 기강을 확립하도록 조치하고 선전관을 파견하여 연대의 상태를 직접 순시하도록 하였다.


내지봉수로서 2000년에 지표조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발굴을 마친 성남시 소재 천림산봉수(天臨山烽燧)는 국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5개의 연조(煙竈) 잔존 상태가 매우 온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전기 축조 제2거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이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고시된 천림산봉수는 성남시가 2019년 4개의 연조를 복원하였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조선 초기 봉수대의 시설인 연변봉수에는 적을 방어하는 보루 성격의 연대를 쌓되 높이 25척, 둘레 70척, 봉수대 밑 4면의 길이가 각 30척, 그 밖에 깊이·넓이 각 10척의 참호를 둘러서 파며, 다시 그 주위에 길이 3척의 말뚝을 박아 폭은 10척의 말뚝 방어지대를 설정하였다. 이때 사용된 척수는 영조척(營造尺) 기준이었다. 또한 연대 위 연조(烟竈: 아궁이와 굴뚝)는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그 높이는 10척을 넘지 않게 하였다. 짐승이 침범할 우려가 있는 곳에는 둘레에 담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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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림산 봉수유적 발굴 후



연조 외에 가설 막사를 지어서 화기 등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보관토록 하였다. 화기를 비롯한 각종 병기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자체 방위상 필요하였고, 그중 신포(信砲)와 발화(發火) 등은 적의 침입 시 위급을 알리는 중요 신호수단이었다.


내지봉수는 위험도가 적어 연대는 쌓지 않고 연조(아궁이)만 설치하였으나 아주 위험한 곳에는 연대를 쌓았다. 1475(성종 6)년 이후 모든 봉수에는 연조 위에 반드시 연통(烟筒)을 만들어 바람으로 주연이 흐려짐을 방지하였다. 모든 봉수에는 봉수대가 다섯 개 있었다. 이는 거수를 5구분하여서 5거일 경우에는 횃불 다섯을 동시에 올려야 하므로 봉수소가 반드시 다섯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봉수대 위에 생활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 봉화군과 오장(伍長) 또는 오원(五員)이 있었다.


봉화군은 주야로 후망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고역을 직접 담당하였고, 오장은 연대 위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봉화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경국대전>에 봉군과 오장의 정원 및 교대는 봉군의 정원을 10인으로 규정하고, 매소 5인씩 위쪽과 아래쪽에 두 번에 걸쳐 10일씩 교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전국에 설치된 봉수대는 600개 이상 되었다. 부산의 다대포에 왜적이 나타났을 때 한양까지 정보를 알리는 데 약 1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한양까지의 거리는 약 450㎞이고, 봉수대는 약 12㎞마다 있었으므로 38개 정도의 봉수대를 거쳐야 함으로 한 봉수대에서 신호를 연결하는 데 약 20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세워졌던 봉수대 자리는 지금의 전파 중계소가 있는 곳과 거의 같다고 한다. 과거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통신 수단인 봉수유적은 지금 거의 파손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봉수대 유적 14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마(驛馬)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중국 남연에 파송한 천리마와 천리인 기록을 통해 우역제(郵驛制)가 이미 광개토왕대왕 시대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붕괴 시 국내성과 평양성간의 17역의 존재와 고구려 영역이었던 신라 북변 천정군에서 발해의 책성부까지 39개의 역이 존재하였던 사실은 이미 고구려 사회에 다양한 교통로와 운용 체계가 존재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9(487)년 3월조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명하여 도로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에 역로를 만들어 우역제를 실시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 성종 때에 이르러서 국가의 평안이 지속되고 인심이 태만해지면서 경상도 남해현 적량에서 사변이 일어났으나 순천 돌산포 봉수는 평시의 예에 의거하여 1거만을 하였다. 또 1510(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 웅천이 함락되어도 봉군은 거화하지 못하였고, 1544년 4월 사량진에서 왜변이 일어났는데 허위로 봉화를 올렸기 때문에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런 봉수의 실효성에 대한 문제는 법령의 해이와 봉화군의 태만으로 매우 심하게 나타났는데 을묘왜변이나 1583년 귀화한 여진족인 이탕개의 난과 임진왜란이 일어났어도 전혀 보고하지 않고 거화하지 않음으로써 봉수제도의 부실화가 드러났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말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제(擺撥制)가 등장하게 되었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적군의 정세를 오직 5거의 방법으로만 전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의 전달이 어렵고 또한 비와 구름·안개로 인한 판단 곤란과 중도 단절 등의 결점이 있었다.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는 전달 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수·장비·이동상황 그리고 아군의 피해상황 등을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파발제도는 하향식 통신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으로부터의 공문서 전달, 관물의 운송, 관리의 왕래에도 이용된 제도로서 ‘역마’라고 한다. 역마는 중요한 교통 통신수단의 하나로서 군사정보 및 공문서의 전달이나 사신과 수령의 왕래에 따른 영접과 운송 그리고 물자의 운반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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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파발을 재현한 통일로 파발제 퍼레이드(출처: 뉴시스)



따라서 국가에서는 역마에 필요한 마필 확보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말에 대한 정책적 관리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용도에 따라 승마용 기마(騎馬)와 운반용 태마(駄馬) 혹은 복마(卜馬)로 구분되고, 크기에 따라 대마·중마·소마 또는 상등마·중등마·하등마로 구별하여 관리하고 역관에 지급하였다.


역마 지급에 대한 정책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원종 때에 포마법(鋪馬法)이 제정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1410(태종 10)년 역마 이용에 통제를 하는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을 제정하고 마패(馬牌)를 제조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또한 말을 사육키 위한 마위전(馬位田)을 지급하여 마필 사육과 역리(驛吏)·마호(馬戶)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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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



마위전은 마전(馬田)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경작하는 면세된 토지로서 그 경작권은 역참에 소속된 마호 등에게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전호경작제(佃戶耕作制) 즉 소작제 경영이 보편화되어 도조제(賭租制)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마 수요는 더욱 증가하게 되었는데 역마는 역의 대소에 따라 다르게 지급되었으며 <만기요람>에 나타난 전국 규모의 역마 숫자는 대략 504개 역에 5380필이 지급되었다.


역마의 관리는 <호남역지>에 따르면 찰방의 책임 아래 병방역리가 담당하였다. 또한 역마는 마적(馬籍)을 작성하여 순영·병영·병조와 본역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역관에 확보된 역마를 사용하는 데는 상당한 규정을 마련하여 지급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각 역의 역마를 이용할 경우는 마패를 발급받아야만 하였는데 이것은 중앙에서 병조가 필요에 따른 마문(馬文)을 발급하면 상서원(尙瑞院)에서 그에 따라 마패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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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도 감사·병사·수사가 중앙 부처에 보고할 일이나 물품을 진상할 일이 있을 때 발마패(發馬牌)를 받아 말을 출급하였으며 사용자의 관등품위에 따라 마필의

차이를 두었다. 이 마패는 한 면에 품위에 따라 사용 마필수(1∼10개)를 새겨 넣고, 뒷면에는 연호·월·일과 ‘상서원인’이라는 글자를 전자(篆字)로 새겼다. 왕족의 경우는 원패(圓牌)로 만들었다.


군사적으로 긴급한 사정이 있을 때는 ‘긴급사(緊急事)’라는 글자를 써서 보내면 쌍마(雙馬)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마패는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인장으로도 사용되었고, 출두 시에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출두’를 외치게 하였다. 역관은 역마 이용자의 관직명과 날짜를 써서 매 계절 말에 병조에 보고하였다. 역마를 사사로이 탄 자와 함부로 내준 자는 모두 장 100대, 유형 3000리의 형벌에 처해졌다.


봉수는 군사목적 이외에는 다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파발제는 관리들의 사사로운 목적 추구에 이용되거나 기밀을 요하는 공문서가 누설되는 등의 폐단으로 조선 후기에 사회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같은 파발제의 폐단은 여러 차례 그 시정이 요구되다가 고종 32(1895)년에 현대식 전화통신 시설이 국내에 설치되면서 파발제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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