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호 역사 순사 사카이 요시아키 이야기
순사 사카이 요시아키 이야기
글 이정은
이봉운의 <국문정리>
이봉운의 국어사전 간행 보도, <독립신문>(서재필, 1897. 3. 6)
한국어에 능통했던 사카이 요시아키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는 1907년 마산경찰서장이 되었다. 1868년 9월생인 그의 원래 이름은 사카이 에키타로(境益太郞). 1899년 4월부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주석경부로 근무한 이래 1906년 1월 마산영사관이 폐지될 때까지 영사관 주석경부로 근무하다 마산경찰서장이 되었다.
나가사키(長崎) 출신의 그가 언제 조선에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5년 27살 때 사카이 에키타로라는 이름으로 이미 조선에서 활동했다. 한국어에 능통했던 사카이 에키타로는 그해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조선의 국어학자 이봉운(李鳳雲)과 함께 <단어연어일화조준(單語連語日話朝雋)>이라는 일본어학습서를 펴냈다. 국어학자 이봉운은 출생과 사망 등 자세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2년 뒤 <국문정리(國文正理, 1897)> 라는 책을 출간하여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그의 한글전용 주장은 주시경보다 7년이나 앞섰다 한다.
다른 한 가지 일은 1895년 그해 10월 8일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날 동이 틀 무렵 일본 병사와 자객 20~30명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총을 쏘며 광화문을 열어젖히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몇 갈래로 왕후 민씨가 머무는 건청궁(乾淸宮)으로 향하면서 막아서는 훈련대 연대장인 부령(副領) 홍계훈(洪啓薰)과 병사들을 칼로 찔러 죽이며 왕후 민씨가 머무는 전각에 들이닥쳐 궁녀들 머리채를 휘어잡고 구타하며 왕후가 있는 곳을 물었다.
그때 러시아인 사바틴(Ivanovich Seredin Sabatin, 士巴津)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왕후를 지키기 위해 궁궐 안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사바틴에게 왕후가 있는 곳을 여러 차례 물었으나 사바틴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하마터면 죽임을 당할 수 있었으나 그는 살아 일본인들이 왕후를 찾아내어 칼로 베고 시신을 궁전 뜰에 끌어내어 장작을 쌓고 석유를 부어 불태우는 만행을 목격했다.
명성황후 참살의 범인들
그날 그 살해자의 무뢰배 속에 마부로 변장하고 한국말에 능통한 영사관 순사도 있었다. 사카이였다. 그의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가 뭘 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 왕후 참살 범인들은 본국에 송환되어 히로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히로시마 법정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주조선 일본공사를 비롯한 범인들을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하고 방면했다. 풀려난 사카이는 복귀하여 1886~1887년 원산영사관 순사, 그 후 인천영사관 순사를 했다.
1899년 4월 경부로 승진한 사카이는 마산영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마산항을 조차하여 군항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인 바 있었고,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군함들이 마산, 진해 및 거제 부근에 출몰, 정박하며 해안을 측량하고 있었다. 이 시기 사카이가 마산과 진해만 등지 러시아 함대의 동향을 정탐하여 보고한 문서가 남아 있다.
1905년 2월 사카이는 “낙동강으로 천렵을 갔다”는데, 2월 한겨울에 무슨 천렵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철새 도래지인 창원군 북면의 낙동강가에 사냥을 갔던 것 같다. 그날 밤 북면 어느 여관에 투숙했는데, 일단의 한국인들이 기습하여 엽총, 탄환, 가방 등을 탈취하고 흉기로 난자해 반죽음이 되었다. 8개월 뒤 그를 공격했던 9명 전원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훗날 그를 만나 본 사람 말에 따르면 그의 얼굴에 흉터가 가득했다고 하는데, 이때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카이는 큰 충격을 받고, 이름도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로 바꾸었다.
1907년 마산경찰서장이 된 후 그 이듬해 1월 1일자로 내무부 번역관, 주임관 4등 경부로 승진했다.
마산경찰서(1909년 순종황제 순행 기념)
1909년 1월 7~13일 순종 황제가 서북지방을 시찰하는 서도순행을 할 때 사카이가 수행하여 훈장을 받았다. 1910년 1월에는 <조선경찰실무요서>라는 한국인 순사와 순사보를 위한 실무지침서를 발간했다.
안중근 의거와 사카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역에서 저격 처단했다. 일본의 국부격인 이토히로부미 처단이라는 대사건이 나자 일제 한국통감부는 이 민감하고 중대한 사건의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말에 능통한 사카이 경부에게 안중근의 성격, 습관, 가족및 주변관계와 거사동기 등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안중근 의사
사카이는 10월 28일 출발하여 평양과 진남포 등지에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동생 등 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11월 2일에 귀경하여 11월 5일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松井茂)에게 조사복명서를 제출하고, 그날 뤼순파견 명령을 받았다. 대한제국 내부(內部)도 사카이를 촉탁으로 임명하여 같은 임무를 맡겼던 것 같다.
안중근 의사는 10월 26일 거사 후 러시아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하얼빈에 구금되어 있다가 11월 5일 러시아의 묵인 하에 일본의 조차지로서 관동도독부가 있는 뤼순으로 압송되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관동주 도독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로서 이전 일본수상 아베신조(安倍晋三)의 외고조부(손녀가 아베 전 수상 할머니)였다.
뤼순의 재판정에 나온 안중근 의사(앞줄 맨 오른쪽)
사카이는 11월 18일 산둥 반도 끄트머리 뤼순에 있는 일본의 조차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안중근 의사는 관동도독부 뤼순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신문을 하여 뤼순 지방법원에서 재판할 예정이었다.
일본 정부는 그 전에 이미 한국 병합 대방침을 결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거를 구실로 무리하게 병합을 서두른다든지, 재판을 무리하게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검찰관, 전옥(典獄, 감옥소장), 간수장 등은 안중근에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안중근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뤼순감옥 당국은 안중근에게 다음과 같이 특별대우를 했다.
하루 세끼 쌀밥을 주었다.
내복을 고급품으로 주었다.
솜이불을 네 벌이나 주었다.
매일 과일을 주고, 우유도 매일 1병씩 주었다.
사카이는 1909년 11월 26일부터 이듬해 2월 중순까지 11번의 신문에 통역으로 참여하여 이틀에 한번꼴로, 최소한 19번 이상 만났다. 처음에 안중근 의사는 사카이
의 정체를 의심하여 경계했으나, 1909년 12월 3일 제6회 신문부터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사카이가 “뤼순감옥의 통역”이라 했으나 단순히 통역이 아니고 통감부의 상당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고 짐작했다.
안중근 의사를 신문한
마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
1909년 12월 3일 제6회 신문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에 대해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사카이는 이날의 보고를 하면서 “지극한 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감동받은 것을 숨기지 않았다. 마조부치(溝淵孝雄) 검찰관 또한 안중근 의사에게 깍듯이 대했다. 신문이 끝나면 마조부치 검찰관은 닭과 금색 필터가 달린 이집트산 고급 담배 권하고, 담배를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조부치 검찰관과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12월 초순, 재판이 시작되기 2달 전에 일본정부가 안중근에 대한 사형방침을 정하고 재판부에 통보한 후 일변했다. 1909년 12월 20일 마조부치 검찰관의 태도가 돌변한 것을 보고 안중근 의사는 ‘저건 본심이 아니다. 외압을 크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고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는 분노가 치밀어 격심한 두통을 겪었다.
사카이는 일본정부의 안중근 사형 방침을 알고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과 의논한 후 안중근 의사에게 자신의 삶과 동양평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기도록 권유했다. 안중근 또한 일본의 고위층에게 자신의 생각과 동양평화에 대한 신념을 전달하길 원했다. 사카이의 권유를 받은 안중근은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뤼순 감옥에서 쓴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묵.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는 <논어>의 귀절
감옥 안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받으려고 줄을 섰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썼다.
“법원과 감옥의 일반 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묵이 66점이며 이 중 31점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단일 인물의 것으로는 최다 기록이다. 유묵은 모두 일본인에게 써 준 것 같다. 대개는 1점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사카이에게 가장 많이 써 주었던 것 같다.
12월 23일 두 동생이 면회왔다. 어머니 조마리아는 성경 십계명에 따라 “죽인 자는 죽어야 한다”면서 죽음으로써 속죄하도록 동생들 편에 전했다.
사카이 요시아키의 안중근 거사 동기 조사 복명서
(1909.11.5)
사카이 요시아키의 안중근 거사 동기 조사 복명서 제2면(1909.11.5)
12월 27일 안중근은 마지막 신문에서 안중근은 사카이에게 자신의 거사 목적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히고, 유언처럼 말을 남겼다.
“나를 하얼빈에 묻어 태극기가 높이 빛나게 해 주시오. 처자식은 두 동생이 알아서 할 것이오.”
1909년 12월 28일 사카이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사카이는 뤼순감옥 전옥 구라하라를 통해 안중근 의사 근황을 듣고 있었다. 그 중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안응칠 역사>는 3월 15일 완성했습니다. 현재 베끼고 있는데 완성되면 조속히 내밀하게 보내겠습니다.”
“<동양평화론>은 이미 서론을 끝내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집필하고 있지만 사형집행 전까지 도저히 끝낼 수 없겠습니다. 사형 집행일을 15일정도 연기해 달라고 청원했으나, 허가되기 어렵습니다.”
재판은 1910년 2월 7일 시작하여 제3회 공판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2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3월 25일 사형집행 전날 동생들과 최후의 면회를 했다. 면회는 눈물로 시작하여 눈물로 끝났다.
뤼순감옥에서 법정으로 출입할 때 호송했던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가 붓글씨를 부탁했다. 사형장으로 가기 전 안중근 의사는 그가 부탁한 글씨를 써 주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은 군인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 마지막 유묵이었다.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호송 헌병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 사형집
행 후 제대신청을 하여 간수 일을 그만두고 철도원으로 일하며 살았다. 이후 지바는 미야기현(宮城県) 구리하라(栗原)시에 대림사라는 절을 세워 안중근 의사를 기리다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자손과 후손들이 지금까지 절을 관리하며 기리고 있다. 유족들은 안중근 유묵을 안중근숭모회에 기증했다.
1910년 3월 26일 사형 직전의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지 7년 후 사카이는 1917년 경기도 경무부 고등경찰과 근무를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때 경무부와 헌병대 유지들이 기념품 증정을 계획하고 기부금을 모집했다. 기부 신청자가 300명에, 금액으로 쌀 15~20섬 가격인 300원 이상이 모였다. 이 돈을 그해 3월 6일 고향 나가사키현으로 돌아간 사카이에게 송금했다(<매일신보> 1917.3.7). 사카이는 이 돈을 고향 집에 조선식 온돌을 들이는 비용으로 쓰고자 했다 한다.
1910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날이며, 3월 26일은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마지막 몇 달간을 일본인 순사요 통역관이었던 사카이 요시아키를 통해 입체적으로 들여다 보았다. 안중근 의사를 가까이서 본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했다.
* 이 글은 도진순의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한국근현대사연구> 104, 2023. 3>)에 힘입은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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