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역사 길상사 이야기Ⅱ

2024.05.1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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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이야기Ⅱ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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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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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첫 시집 <사슴> 중 본문



시인 백석

“내 모든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성북동 1000억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세상의 이목을 끈 김영한, 즉 기생 김진향은 시인 백석의 시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김영한이 흠모했다는 백석은 젊은 여성이 반할 만큼 준수한 용모, 뛰어난 머리에 ‘심한 멋쟁이’였다.


백석의 원래 이름은 백기행(白夔行). 광복 후 백석(白石, 白奭)으로 개명했다.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의 ‘석(石)’을 썼다고 한다. 그는 김영한보다 5살 위로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지면 익성리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단양 이씨 이봉우(李鳳宇)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조선일보 사진기자로서 사진반장까지 했던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


백석은 12살 때인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기 백석은 학과 수업 뿐 아니라, 독서와 문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 백석은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광산사업가이자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가 같은 평북 정주 사람으로 아버지와 친구 사이였다.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시험을 치르고 일본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입학했다. 아오야마학원에서 백석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영어를 전공하면서도 독일어 수업도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애제자로 여겼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를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의 외국어 실력은 그 후 한국 번역문학의 역사에 귀중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입학 이듬해인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부문에 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소재로 인간의 욕망을 그린 <그 모(母)와 아들>로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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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기생명 김진향

(출처: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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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1929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사진의 컬러 복원)




김영한이 조선 권번에 들어갔을 즈음인 1934년 백석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의 권유에 따라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교정부에서 근무하며 조선일보 계열의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그리고 틈틈이 신문에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를 비롯한 외국 문인들의 수필을 번역해 싣기도 하고, 2편의 단편소설도 연재했다.


그러나 소설보다 시로 방향을 돌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출판부로 자리를 옮겼다. 잡지 <조광> 창간에 참여하여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가 매진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잡지 편집자로 재능을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작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한은 언제 백석을 처음 알았을까? 세상 풍문이 어디보다 빠르게 유통되는 당시의 연예가였던 그 업계에서 ‘심한 멋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조선일보의 스타 백석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백석은 키가 185㎝의 장신에다 항상 최고급 양복을 입고, 최고급 구두를 신었다. 남들이 20~30전짜리 양말을 신을 때 그는 1원이 넘는 고급 양말을 고집했다. 그날 입을 옷에서 양말에 이르기까지 허투루 고르는 법이 없었다. 지저분한 식당에는 가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때는 손수건으로 수화기를 감싸고 통화했다.


그런 그에게 주변에서 눈치를 주면 “여러 사람의 손과 입김이 닿은 것이어서”라고 대꾸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1930년대의 문단>이란 글에서 “얼굴색은 거무스레했는데, 스타일은 여간한 모던보이가 아니었다”고 백석을 회상했다.


김영한이 매혹되었던 백석이 시인으로서 당시에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1936년 1월 20일,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출판했다. 신문사에서 편집과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쓴 33편을 담은 시집이었다. 시집은 두꺼운 흰색 표지에 내지와 본지 모두 전통 한지를 사용하여 자비로 100부 한정판으로 출판했는데, 문단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책의 대부분을 증정용으로 썼다. 그래서 백석의 시집은 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신경림 시인은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자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며 줄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한다. 윤동주도 백석을 흠모했다. 윤동주는 아무리 구하려 해도 시집을 구할 수 없자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 지니고 다녔다 한다.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에는 백석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예술인으로서 예술적 감성을 가진 김영한이 “내 모든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한 배경에는 백석에 대한 당대 문학인들의 이런 관심과 높은 평가가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의 ‘심한 멋쟁이’ 백석은 경성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등의 시를 조선일보, 잡지 <조광> <여성> 등에 발표하고 1937년 겨울에는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어 서울을 떠났다.


그의 함흥행에는 본격적인 시를 쓰고자 한 것도 있었지만,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대륙 침략이 더욱 광기를 더해가면서 춘원 이광수를 필두로 조선의 문인 및 예술인들을 동원하여 조선작가협회를 창립하고 친일행위를 강요하는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무렵 함흥 주변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시에 담아내었다. <북관(北關)>이라는 시에서는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라든가, <북신(北新)>이라는 시에서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라는 구절을 넣어 민족 말살의 엄혹한 시기에 민족적인 색채를 과감히 드러내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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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모



시인 백석과의 만남(?)

백석에게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이라는 후원자가 있었던 것처럼, 김영한 즉 기생 김진향에게는 신현모(申鉉謨, 이명 윤국允局, 1894∼1975)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신현모는 황해도 연백 출신의 재력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조선어학회 <조선어사전> 편찬을 재정위원으로 도왔다.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김영한이 태어나던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활약하면서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과 청년혈성단 등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국사강의록(國史講義錄)>을 간행하고, 조선물산장려회,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다.


김영한은 1935년 나이 18세 때 신현모의 후원으로 백석처럼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갔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을 아껴주던 후원자 해관 신현모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때가 1936년이라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면회를 위해 함흥으로 갔으나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흥 땅에 주저앉아 함흥 권번의 기생이 되어 유력자를 통해 면회의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한다. 


김영한은 그해 가을 영생고보 교사들이 요리집 함흥관에 왔을 때 영어교사 백석을 만났다 한다. 그 자리에서 백석과 자야는 서로 깊은 눈길을 주고받았으며, 백석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1)>를 떠올리며,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주었다 한다.



자야오가(子夜吳歌)1)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라고 하며, 380년 무렵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때 오(吳, 지금의 강소성 일대) 땅에 살던 자야(子夜)라는 여인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노래한 애절한 노래로서 민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이백(李白)을 위시한 많은 후인(後人)들이 이 곡에 따라 시를 지어 <자야가(子夜歌)> 42수, 사계(四季)를 노래한 <자야사시가(子夜四時歌)> 75수가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실려 전한다. (향림거사(香林居士)의 마음공부, 네이버 블로그)




김영한은 “백석이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내가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김영한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 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의 11칸짜리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가 백석 집안의 반대로 28일 만에 헤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말해 줄 증거자료는 없었다 한다.


당시는 편지로 소통하던 시대였고, 백석은 편지를 자주썼다. 백석의 지인들은 백석에게서 받은 편지가 많았다. 그러나 3년간이나 연인관계였다는 김영한은 백석에게서 받은 편지 1통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한다.


사건과 연대도 맞지 않았다. 김영한은 1936년 함흥으로 갔다고 했는데, 후원자 신현모와 관련된 수양동우회 사건은 1937년 8월에 있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었다. 수양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그중 41명이 기소되었는데, 그때 신현모도 체포되어 1938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가 재수감되어 1939년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검사가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아 풀려났다. 더구나 재판은 경성에서 있었고, 함흥으로 갈 일이 없었다.


그녀가 함흥으로 후원자 신현모 면회를 갔다면 그 사건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어야 한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에 함흥, 그것도 백석이 그 4~5년 전인 1937~1938년에 교사로 있었던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났다. 당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에 이어 아시아 태평양 전체를 전쟁 도가니로 몰아가며 조선인의 물자와 인력, 나아가 민족적 정체성까지 말살하여 전쟁에 동원하고자 광분하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여 이에 반하는 자들을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게 했다. 이런 민족말살의 위기에서 ‘말은 곧 정신’이라고 생각한 조선어학회가 조선어 보전을 위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경찰 당국이 함흥영생고등여학교 교사 정태진(丁泰鎭)이 여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감화를 주고 있었고, 서울에서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2년 9월 5일 교사 정태진을 시작으로 신현모 등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이 다 함흥으로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김영한이 1936년에 후원자 면회를 위해 함흥으로 가서 백석을 만났을 개연성이 없다.


백석은 1938년에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가 1940년 1월 생계를 위해 만주국 수도 신경(오늘날 장춘)으로 가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취직했다. 이후 낮에는 민주국 경제부 통역 겸 측량보조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러시아인 마을에 살며 러시아어를 배우는 한편, 시를 짓고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번역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석은 다시 만주 안동(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거기서 두번째 부인을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했다. 즉 백석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함흥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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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에 촬영한 백석 가족사진. 백석 옆에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 아들과 막내 딸(출처: 출판사 흰당나귀)



김영한이 흠모한 백석은 조선일보 근무하던 시절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과 친했다. 그 시기 통영 출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박경련을 좋아하여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백석은 여러번 통영을 찾으며 그녀와 결혼하고자 애썼으나, 상대편 집안의 반대와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친구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고, 시 <바다>와 <통영> 3편과 <남행시초> 연작 및 수필 <편지>로만 남았다.


백석은 세 번 결혼했다. 1939년 이화 출신의 충북 진천 부잣집 딸 장정옥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헤어졌다. 두 번째는 1942년 압록강 국경도시 안동에서 평양 출신 화가 문학수의 중신으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유학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의 여동생 문경옥과 결혼했다. 이 결혼 또한 아이의 유산과 고부갈등 등으로 이듬해 이혼으로 끝났다. 세 번째는 2년 후 해방 무렵 평양에서 이윤희를 만나 비로소 안정을 찾고, 199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년 넘게 해로하며 3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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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증(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사진(출처:

출판사 흰당나귀)



백석은 해방 후 월남 권유를 거부하고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과 비서로서 도왔다. 북한에서 김일성 체제가 들어서고 조만식 선생이 연금당하자 백석은 러시아 문학 번역과 아동문학, 특히 동시에 몰두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시기 1년에 10권씩 번역했고 그 수준도 최고였다 한다.


김영한, 즉 백석을 사모한 기생 김진향에게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실었던 적도 있었으며, 1953년 36세의 만학도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김영한은 성북동의 대원각의 주인이 되어 큰 재산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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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첫 시집 <사슴> 초판본




반면 북한의 백석은 1958년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하자”라는 주장을 했다가 1959년 6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 양치기로 쫓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1996년 고난의 행군 때 83세로 사망했다.


남한에서 백석은 월북시인으로 규정돼 출판금지 대상이 되어 거의 잊혀졌다가 1988년 납북·월북 작가 해금 조치가 되면서 문학사 논의에 복귀했다. 해금 이후 그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600편이 넘고,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005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의 시집 중 1위를 차지했다.


송준이라는 대학생이 막 해금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었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내가 마치 아내와 집과 가족을 잃어버린 듯 ... 강하게 감정이입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국내 학계가 백석을 단지 국내 작가의 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데 오기가 발동하여 ‘백석을 세계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올려놓겠다’고 결심하고 20여 년을 백석의 삶과 작품을 추적하는 데에 바쳤다. 그는 기자·추적 탐사 작가 신분으로 중국·러시아·일본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백석의 작품과 사진 그리고 지인들의 증언을 발굴했다. 그리하여 1994년에 최초의 백석 평전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 2권을 출간했다. 마지막 3권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다 조선족 동포를 통하여 북한에 백석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책 출판을 중단했다. 백석과 그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 후 경제적 어려움과 대장암 투병으로 10년 동안 연구를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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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나온 백석의 변역서들. 백석 연구가 송준이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구했다.(출처: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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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당나귀에서 펴낸 백석시 전집



송준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를 연구하면서 “생전 김영한을 직접 인터뷰했는데, 백석의 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3년을 연애했다면서 편지 하나 가진 게 없다”고 하며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고 책에 썼다.


국문학계에서도 백석이 직접 김영한이나 자야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전혀 없다 한다. 김영한이 <내사랑 백석>이라는 책에서 백석이 자신한테 헌사했다는 시는 백석이 김영한을 만나기 전에 쓴 시라고 한다.


한편 충남 천안에 백석의 시를 읽고 함께 공부하던 시민들 모임이 있었다. 이들이 송준 작가를 찾아내고, 백석 시인의 책을 내기 위해 도서출판 흰당나귀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흰당나귀는 백석의 시에서 나온 이름이고, 위치는 천안시 ‘백석동’이었다. 그리고 2012년 9월 전4권의 평전 <시인 백석> 세트가 나오게 되었는데, 책을 인쇄한 곳이 일산의 ‘백석역’ 근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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