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호 역사 고려 남녀의 자유로운 성애 묘사
고려 남녀의 자유로운 성애 묘사
‘퇴폐적이다’ 조선시대 못 부르게
글·자료 이림 시나리오 작가, 허선(국악인)
사진 백은영, 이태교
만두가게의 은밀한 사랑
<쌍화점(雙花店)>은 유명한 고려가요다. 조선시대 유학을 숭상했던 왕실은 노래가 너무 야하다고 부르거나 공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왜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삼았을까. 남녀 사이의 노골적인 애정을 내용으로 했다는 이유에서다.
노래 제목 <쌍화점>은 ‘만두가게’를 지칭한 것이다. ‘쌍화(雙花)’는 만두의 일종인 ‘솽화’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솽화’는 몽골인, 여진족 등이 즐긴 북방식 만두다.
제목부터 몽골족 원나라의 풍속이 나타난다. 사실 <쌍화점>가사를 보면 에로틱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고려인들의 은밀한 애정에 대한 호기심이 엿보인다.
이 가요도 작자 미상이다. 고려 충렬왕 때 유행한 가요라고 전해지는데 시기도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충렬왕(1236~1308) 때 궁중 잔치에서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충렬왕은 원 황실과 처음으로 통혼한 고려왕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다. 충렬왕의 부친인 원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에 통혼을 요청했으며, 왕도 연경에 들어가 세조의 딸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공주와 혼인했다.
<쌍화점>은 <고려사> 악지에 한역되어 실려 있는 <삼장(三藏)>이라는 노래 내용이 제2절과 똑같다. 이 노래를 <삼장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충렬왕이 잔치를 베풀면서 오잠(吳潛), 김원상(金元祥), 석천보(石天輔), 석천경(石天卿) 등에게 자주 노래를 짓게 하였으므로 <삼장> 곧 <쌍화점>은 그들의 작품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쌍화점>은 모두 4절로 되어 있다. 고대가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창한 운율과 더불어 고려시기 금기시하던 왕궁을 우물로, 제왕을 ‘용(龍)’으로 표현한 점 등은 뛰어난 기교”라고 평가하고 있다.
경남 산청군 삼장사지터와 삼장사지 삼층석탑
시대적 윤리관에서 배척은 아쉬운 일
조선 성종 때부터 <쌍화점>은 폄하되었다. 이에 대해 요즈음 학자들은 시대적 윤리관에 배치된다고 하여 억압받은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문학자 임현석은 논문(2011,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서 “고려가요가 우리의 값진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된 가사를 ‘비리(鄙俚)’니, ‘리어(俚語)’니 하여 폄하하였으며, 남녀의 애정문제가 조금만 섞여도 ‘음사(淫詞)’라고 하여 독단적으로 삭제하거나 한문으로 개작 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려가요 중에 <서경별곡> <쌍화점> <이상곡> <만전춘별사> 등은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더욱 시련을 겪었으며 그것은 순전히 고려가요의 내용이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적 도덕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비판했다.
‘남녀상열지사’라는 이유로 문학적 가치가 폄하될 일은 아니다. 설사 지나친 성애(性愛) 감정 표출이라 하더라도 고려 사회 문학의 리얼리티이며 사회적 현실이면 문학적 가치는 더욱 높이 평가될 수도 있다는 반론에 필자도 동의한다.
주인공 여인에 대해 재미난 해석을 내놓은 견해도 있다.
“여인은 삼장사에 가서 봉사를 했다. 그러나 주인과 손을 잡았다는 추문이 날 것을 걱정하여 동자승의 입조심을 경계한다. 그러나 소문은 점차 증폭된다. 이에 여인은 소문에 대하여 진실을 해명할 수 없는 상황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억울한 소문에 대한 여인의 강한 한탄으로 이해하였던 예는 이미 조선 후기의 문인인 서포 김만중의 악부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충북대학교, 어강석, <高麗歌謠 雙花店의 再解釋>, 고전과 해석, 30권, 고전한문학연구학회 2020).”
<쌍화점> 노래 형식
가요 형식은 전편 4연이며 그중 아래 2구는 후렴이다. 전 3구는 ‘4·4·4’, 제4구는 ‘4·4·4·3’, 후렴 2구는 ‘4·4·3’, ‘5·4·2’로 전 연이 모두 동일한 음수율(音數律)의 정형을 취하고 있다. 쉽게 현대어로 의역하여 싣는다.
<쌍화점> 1절은 다음과 같다.
쌍화점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 그 잔 데 같이 덤 거친 곳 없다”
2절에는 삼장사가 나온다.
삼장사에 불공하러 갔는데 / 그 절 지주가 내 손목을 쥐여이다 / 이 말씀이 이 절 밖에 나고 들면 /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 더러둥셩 다리러더러 다리러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자리에 나도 자러가리라 /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잔 데 같이 더럽고 거친 곳 없다
경남 산청군 삼장사지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석축
3절에는 우물 용이 여성 화자의 손목을 잡는다. 우물가의 용은 바로 왕이다.
두레우물에 물을 길러 갔는데 /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여이다 / 이 말씀이 이 우물 밖에 나고들면 /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 더러둥셩 다리러더러 다리러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자리에 나도 자러가리라 /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더럽고 거친 곳 없다
4절의 무대는 술집이다.
술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는데 / 그 지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 이 말씀이 이 집 밖에 나고 들면 /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술바가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 더러둥셩 다리러더러 다리러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자리에 나도 자러가리라 /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잔 데 같이 더럽고 거친 곳 없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무대는 만두가게, 삼장사, 두레우물 그리고 술집이다. 여인은 이 세 곳에서 남자들로부터 유혹을 받으며 손목을 잡힌다. 그런데 모두 해학적이며 비밀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에 손목 잡은 것이 탄로 나면 제1절은 어린 광대, 2절은 어린 상좌, 3절은 작은 두레박, 4절은 술바가지에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자신의 애정행각을 알고 있는 어린 승려와 사물에게 비밀 함구의 은유를 담고 있는 설정이 재미있다.
자유분방했던 고려 성풍속사
고려 사회는 후대에 성리학이 국가적 이념으로 자리 잡기 전에는 남녀 관계가 자유스러웠다. 여성의 개가금지를 터부시한 관념이 자리 잡기 전에는 남녀의 사랑이 폐쇄적이지 않았다. 남자가 그리운 아낙네는 병든 남편을 집에 두고 몰래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는 가사도 전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남녀 혼욕 풍습까지 있었다”고 썼다. ‘경합이리(輕合易離)’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남녀 간 만남과 이별도 어렵지 않았다. 서긍은 또 이렇게 썼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란분회(盂蘭盆會)’는 석가탄신일이나 7월 백중 때 사암(寺庵)에 난을 바치며 예불하는 풍속이었다. 불교의 <우란분경(盂蘭盆經)>에는 우란분회에 대한 의의와 격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축제가 일부 사녀(士女)들에게는 해방의 날이 됐다. 이날이 되면 너도나도 잘 가꾼 난과 과일을 들고 사암을 찾았다. 그런데 일부 사녀들이 해방감에서 승려들과 추문이 일자 공민왕은 어명으로 부녀자들이 출행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몽골풍이 들어와 일부다처제가 확대되면서 재미난 기록이 전한다. 1275년 충렬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연등회에 나섰을때 일이다. 대부경 박유(朴褕)도 왕의 행차를 따르고 있었다. 이때 한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아내를 여럿 두자고 청한 놈이 바로 저 늙은 거지다(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부녀자들도 다 같이 손가락질했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손가락들로 두름을 엮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박유가 충렬왕에게 주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본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신분에 상관없이 아내(妻)를 한 사람만 두고 있습니다. 원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아내의 수에 한도가 없으니 여인과 물산이 모조리그들이 사는 북쪽으로 흘러갈까 걱정됩니다. 이제부터 대소신료들이 여러 명의 처를 둘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 수는 품계에 따라 정하고 평민도 일처일첩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또 본처가 아닌 아내의 자식도 벼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과부와 홀아비가 줄고 인구가 늘어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1275년 2월).”
경남 산청군 삼장사지 삼층석탑을 살펴보고 있는 답사팀
<고려사> 이곡(李穀) 열전에는 원나라 사신들도 고려에 와서 처첩을 얻어 귀국까지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요즘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황제의 명이라 해 처녀만 데려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처첩까지 얻으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재물과 여색으로 독직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를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정 후정에 여인들이 이미 차고 넘치는데 구태여 외국에서 데려와야 합니까.”
영화 <쌍화점>
영화 <쌍화점>은 지난 2008년 12월 30일 개봉한 영화다. 원의 억압을 받던 고려 말 왕의 호위무사 ‘홍림(조인성 분)’을 그렸다. 흥미로운 소재라서 흥행도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요 <쌍화점>과는 정서가 다른 고려 말 자제위(子弟衛)들과 동성애에 탐닉했던 공민왕의 성도착 일탈을 소재로 삼았다. 이름만을 빌린 셈이다.
실지 고려 인물로 자제위였던 홍륜(洪倫, ?~1374년)은 고려후기 홍언박의 손자이자 홍사우의 아들이다. 1372년에 설치된 자제위에 소속되어 공민왕을 보필하는 한편 공민왕이 후사를 보기 위해 자제위에 소속된 청년들을 비빈들과 사통시켰다. 홍륜 또한 공민왕의 셋째 부인인 덕풍군의 딸 익비 한씨와 관계를 맺었다.
이후 임신한 사실이 공민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을 전부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겁을 먹은 폭로자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가 모반하여 공민왕을 시해했다. 이후 홍륜은 공민왕을 시해한 것이 발각되면서 처형당했다. 영화는 홍륜을 홍림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삼장사는 어디인가
<고려사(高麗史)>에는 ‘<삼장가(三藏歌)>가 충렬왕 때 소작이며 성색(聲色)을 좋아하여 각 도에서 재기 가인들을 모아 노래를 읊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쌍화점을 <삼장가>라고 한 것이다.
삼장(三藏)이란 경(經)·율(律)·논(論)의 세 불경을 설명한 말이다. 석가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하고, 석가가 가르친 윤리·도덕적인 실천규범을 율(律)이라 하며, 논리적으로 설명한 철학 체계를 논(論)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장(藏)이란 이것을 담고 있는 광주리를 뜻한다.
전국 사찰사료를 보면 ‘삼장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 두군데 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인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사지와 강원도 삼척 삼장사는 현재도 존속되고 있다.
<고려사>에 <삼장가>로 기록될 정도라면 우선 오래된 사찰이어야 한다. 우리는 경남 산청군 삼장사터를 지목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아 조선 전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3층 석탑 등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간행된 <조선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석탑과 더불어 큰 규모의 동으로 만든 좌불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글마루 취재반은 5월초 새벽 6시에 서울을 떠나 12시경 경남 산청군 삼장사지에 도착했다.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무더위다. 절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 밭둑에 우람한 고탑이 취재반을 맞는다. 이 탑은 단아하면서도 장중한 3층석탑이다.
경남 산청군 삼장사지터에서 찾아진 와편들
산청군 자료를 보면 높이가 3.4m라고 했다.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하층기단에는 양 우주(隅柱)와 1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고,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하층기단 갑석(甲石)의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상층 기단받침을 마련했다.
고려시대 대찰의 잔영은 탑 주변 여기저기서 찾아진다. 본래는 신라 통일말기의 창사로 짐작되며 절터에 뒹구는 숱한 와편들이 옛 영화를 알려주고 있다. <쌍화점>이 불리던 시기에 만든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연꽃무늬 와당은 없을까.
답사반은 절터에서 고려시대 전형적인 귀목문(鬼目紋) 암막 새, 연화문이 양각된 평와편을 수습했다. 또한 평와에 길게 2조의 구획선을 만들고 화불모양의 장식을 한 이형의 평와편을 찾기도 했다. 우리나라 절터에서는 처음 나온 이 와편은 고려시대의 소작으로 추정되는데 색깔은 적색이며 상하에는 사격자문양이 새겨져 있다.
또 고려시대 흑백상감 국화문 청자 편과 당초문 음각와편 그리고 여러 점의 청자편과 고려시대 백자편 등을 확인했다. 조선 초기 질 좋은 분원백자편도 다수 수습되고 있다. 이 같은 유물로 미루어 삼장사는 고려 전성기에 창사되어 번성하였고 조선 초기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 삼장사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귀목문 암막새. 연화문 장식 평와. 2. 적색의 이형와편. 다양한 문양이 돋보인다. 3. 고려청자 국화문 청자 파편
4. 삼장사지에서 확인된 고려청자와 고려백자편. 고려시대의 영화를 입증하고 있다.
에필로그
봄철 산청의 아름다움은 자산홍에 물든 황매산이다. 정상에축조되어 있는 드라마 세트장인 성곽은 평소 꼭 한번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곳이다. 황매산은 고려시대 호국선사 무학대사의 수양지로도 유명하다. 황매봉을 비롯하여 동남쪽에 펼쳐진 기암절벽은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린다.
운무에 싸인 정상에 올라서 본다. 이름대로 매화꽃 속에 떠있는 듯 신비한 느낌이다. 답사반은 전국의 유명 산하를 많이 봐왔지만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절경을 만나보지 못했다. 매년 5월에 열리는 황매산 철쭉제에는 전국에서 많은 인파들로 성시를 이룬다. 조선 명의 유이태, 어의 허준의 동의보감촌과 한의학박물관도 볼거리다.
산청군 삼장사지는 고려가요 <쌍화점>의 무대일 수도 있다. 고려시대 자유스러운 남녀상열의 해학과 은유를 담은 대표적 가요의 고향을 밝혔으면 한다.
삼장사 길도 관광지로 복원하여 젊은 남녀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개발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산청군도 인구 절벽을 극복하는 것이 화급한 문제가 아닌가. 삼장사지를 떠나며 노래 가사가 떠올라 적어보았다.
<새 삼장가>
봄바람 따뜻하여
철쭉이 만발한 황매산
쌍화점에서 손잡은 인연
삼장사에서 탑 돌며
다시 잡아도
허물이 안 되는 세상 되었네
선남선녀들 모두 모두 짝 찾아
백년 가약 이루는 것이
나라도 사랑하는 길
삼장가 불러 인연을 만들어 보세
삼층탑 돌며 소원을 빌어 보세
경남 산청군 황매산
등록된 코멘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