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호 역사 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Ⅳ
성북동 길상사 이야기 Ⅳ
글 이정은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
백인기 가족
백인기의 재산과 화성농장
경성부 낙원동 283번지 대저택에 살며, 성북정(町) 323번지 길상사 자리를 별장으로 소유했던 백인기의 재산은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10년 동안 급속하게 늘었다. 1926년 8월에 논1136.6정보(340만 9000평), 밭 88.9정보(26만 6700평) 등 합 1249.9정보(374만 9000평)이었던 것이, 불과 4년도 되지 않은 1930년 말에는 논 2099정보(629만 7000평), 밭 197정보(59만 1000평) 등 합계 2696정보(808만 8000평)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다시 6년 뒤인 1936년에는 논 1483정보(444만 9000평), 밭 2203정보(660만 9000평) 등 1.4배가량 늘어 합계 3686정보로 1105만 8000평이 되었다. 10년 만에 3배로 늘었다. 1105만 평은 논 1마지기를 200평으로 치면 5만 5250마지기이다. 보통 만석꾼이라 할 때 논 1만 마지기를 갖고 1마지기당 1섬, 1만 마지기에서 1만 석을 거두는 지주가 만석꾼이다. 5만 5250마지기를 가진 백인기가 5만석꾼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백인기 5만석 대농장은 이리(익산) 화성농장(華城農場)을 중심으로 김제·전주·임실·삼례 지역에 출장소와 관리인을 두어 관리했다. 그의 농장에는 소작인이 4685명 있었으며, 소작인을 관리하는 마름(舍音)이 55명이나 되었다.
1936년 8월 1일 백인기는 1105만평으로 늘어난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화성사(華星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했다. 화성사의 업종은 농림업, 자본금은 50만 원, 대표자는 장남 백명곤(白命坤)이었으며 중역으로 총주식 50만 주 가운데 장남 백명곤 18만 5000주, 백인기 본인이 18만 5000주를 가져 전체의 74%를 보유하고, 나머지를 백명곤의 아들이자 백인기의 손자 백윤승(白鈗勝, 의사) 10만 주,백윤호(白鈗浩) 3만 주의 지분을 보유했다. 이 화성사의 본점 주소가 경성부 성북정 323번지로서 성북동의 별장, 곧 길상사가 있는 곳이었다.
백명곤
일본과 독일에서 함께 공부했던
김준연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
5만석꾼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白命坤)은 1905년생으로,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러나 백명곤은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없었다. 문화예술,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 주색잡기에도 능하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 백인기가 말했다.
“조선에 남아서 그렇게 한량처럼 살 바에는 외국으로 나가 견문을 넓히도록 하라.”
유학 가라는 말이었다. 돈만 펑펑 쓰는 생활을 정리하고, 정신을 차리라고 권한 것이었다. 아들 백명곤은 191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김준연을 만났다. 김준연은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7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독법전공)에 다니며 1919년 2·8독립선언 주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김준연을 만난 지 1년 후인 1920년 김준연은 졸업하고 1년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연구실 조수로 근무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김준연의 <나의 편력 포츠담 유학(매일경제 1969. 04. 18)>에 의하면 그는 1921년 가을에 유럽노선을 정기항해하는 일본 우선 회사(郵船會社)의 가모호(加茂丸)를 타고 일본 고베(神戶)를 출발, 40여 일이 걸려 11월 초에 블란서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백명곤은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후 김준연의 뒤를 이어 독일로 떠났다. 독일 유학은 김준연의 독일행을 보고 본인이 선택한 일인지, 아버지 백인기의 바람과 권유인지 분명치 않다. 아버지는 백명곤이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오기를 원했다 한다. 백명곤보다 먼저 베를린 대학으로 간 김준연은 베를린 근교의 인구 6만쯤 되는 소도시 포츠담에 자리를 잡았다. <포츠담 선언>의 그 포츠담이다.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정치 경제등 제반 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게다가 배상금은 금이나 외화로만 지불하게 했다. 새로 들어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보유한 금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금이 고갈되자 독일 화폐로 외화를 사려고 마르크 화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시중에 마르크의 공급이 증가하자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했다.
포츠담시
백명곤이 베를린에 도착했던 1922년에는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초인플레이션으로 발전했다. 생활비지수는 1922년 6월에 41이었던 것이 12월에는 685로 거의 17배나 뛰었으며, 1922년 가을, 독일의 마르크화는 사실상 휴짓조각이 되었다. 1922년 말 독일이 프랑스에 배상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자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은 1923년 1월 독일의 주요 산업 지역인 루르를 점령했다. 1922년 말에 약 160마르크 하던 베를린의 빵 한 덩이 값이 1년 뒤인 1923년 말에는 200,000,000,000마르크, 즉 2000억 마르크가 되었다. 빵 한 덩어리 사려면 트럭으로 돈을 몇 트럭 싣고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 그 시기에 독일에 유학했던 유학생들 생활이 어떠했을 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학생들은 베를린에서 열차로 20~30분 거리에 있는 교외 포츠담의 제펠린가(Zepplinstrasse) 183번지에 집 하나를 구해서 한인학생구락부(클럽)를 만들고, 그곳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그 후 조선에서 베를린으로 새로 오는 학생들은 모두 포츠담으로 모여들었다. 백명곤도 여기에 합류했고, 이 시기 유학생 배운성(裵雲成), 정석호(鄭錫好), 박승철, 황우일, 최두선, 이갑수, 박주병, 박장용, 이운용, 한상억, 윤동섭, 김필수, 유일준 등도 이때 여기에 합류했다.
백명곤의 유학 생활은 병으로 3년 만에 중도에 끝이 났다. 조선으로 돌아온 백명곤은 다시 과거 금수저 한량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포츠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누볐으며, 스포츠카를 타지 않는 날에는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거리를 질주했다.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말을 대체하여 연락병이나 헌병에게 지급되어 전선을 누볐다. 덕분에 할리데이비슨사는 세계 최대의 오토바이 생산업체로 부상했었다.
축구단 구단주 백명곤
1920년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와 같은 제1회 전조선체육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제2회 대회 때부터정구와 함께 축구가 정식 종목이 되었다. 평양에는 숭실대학을 졸업한 예수교 전도사 박종은에 의해 1918년에 창단된 무오축구단이 있었는데, 평양무오단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축구단은 1933년에 평양축구단으로 바뀐다.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우승기념사진(1922년 11월)
경성(서울)에는 1917년 휘문의숙 출신 불교 승려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한 불교청년회 축구단이라는 팀이 있었다. 평양과 서울의 두 팀이 전국대회 결승전에서 만나 자웅을 겨루었다. 첫 대회였던 제2회 전조선체육대회 때는 평양의 무오축구단이 3:0으로 승리하여 우승하고, 경성의 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준우승을 했다. 그해 11월에 열린 제3회와 이듬해 제4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는 경성의 불교 청년회 축구단이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전국대회 우승컵을 놓고 벌이는 무오축구단과 불교청년회 축구단의 각축은 평양과 경성이라는 지역 연고에다,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불교의 라이벌전이 되어 일반의 열광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불교청년회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치며 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25년 4월 들어 8년 동안 버티어 오던 불교청년회 축구팀이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불교청년회 축구팀의 해체는 경성 대표팀이 없어진다는 말이었다.
백명곤이 나섰다.
“이 팀을 제가 살리겠습니다.”
축구를 무척 좋아했던 백명곤은 불교청년회 이건표 감독과 협의한 끝에 불교청년회 선수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유지하고 역사까지도 계승하면서 이름은 조선축구단으로 바꾸기로 했다.
낙원동 백명곤의 저택은 조선축구단 선수들의 합숙소가 되었다. 백명곤은 우수한 선수를 스카우트 하고 선수들에게 월급을 주며 축구에 집중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학교 동문 위주의 동아리 성격의 팀이 요즘의 프로팀같이 되었다. 조선축구단은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7개월 뒤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에도 결승에서 평양의 무오축구단을 꺾고 또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축구가 정식종목이 되어 처음 전국대회가 열린 제2회 전조선체육대회 광경(출처: 동아일보 1922년 11월 24일 제3면)
축구가 정식종목이 되어 처음 전국대회가 열린 제2회 전조선체육대회 우승팀 무오축구단에 우승기를 수여하는
광경(출처: 동아일보 1922년 11월 24일 제3면)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 다른 팀 선수들은 집이나 숙소에서 경기장까지 걸어서 갔으나 조선축구단은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경기장 입구에 도착하여 멋진 옷을 입고 내렸다. 경기가 끝나면 백명곤은 다시 승용차를 경기장 앞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선수들을 낙원동 자신의 집이자 합숙소로 데려갔다. 선수들이 도착하면 중국인 요리사가 요리를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백명곤은 조선축구단을 ‘모든선수들이 오고 싶어하는 꿈의 구단’으로 만들었다.
1925년 백명곤은 조선축구단 단장 신분으로 선수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 원정을 떠났다. 원정 비용 일체를 백명곤이 부담했다. 1926년에는 조선축구단이 일본 원정을 떠났다. 백명곤은 선수들에게 초고가 영국제 홈으펀 양복을 맞추어 입혀서 보냈다. 당연히 모든 비용은 백명곤이 부담했다. 이때 백명곤이 아버지 명의로 된 어음으로 몰래 돈을 조달했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축구단과 동행할 수 없었다. 백명곤은 일본 원정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걱정 말고 가서 이기고 돌아오라.”
조선축구단은 일본 원정에서 5승 3무의 성적으로 일본 팀들을 깨어 식민지 조선의 설움을 갚고 돌아왔다. 그후 크리스마스가 되자 백명곤은 선수들을 위해 자신의 집에 수십명의 기생을 불러놓고 파티를 열었으며, 자신이 직접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선수들에게 비싼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1927년 1월에는 조선축구단 감독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다시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중국 상하이 원정에서 조선축구단은 영국 육군 팀과 3차례 대결을 펼쳐 첫 경기는 3:4로 패했지만, 이후 두 경기를 각각 4:3과 5:4로 이겨 2승 1패를 기록했다. 이처럼 조선축구단은 백명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백명곤은 이런 딴짓(?)을 하다 벌여놓은 사업이 실패하면서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백명곤이힘을 잃을 즈음 경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성축구단이 창단되었다. 조선축구단 선수들은 대거 경성축구단으로 넘어갔다. 1935년 백명곤의 조선축구단은 창단 10년 만에 영광의 역사를 뒤로하고 해체 되었다.
백명곤이 조직한 한국 최초의 재즈밴드 코리안 재즈 밴드의 경성청년회관 첫 공연 장면
한국 재즈 악단의 시작과 백명곤
백명곤은 1925년 1차 상하이 원정경기 때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처음 재즈를 접했다. 그는 상해에서 돌아올 때 색소폰과 트럼본, 트럼펫, 드럼 등 악기와 재즈 악보를 구하여 와서 평소 친분이 있던 홍난파와 훗날 초대 의사협회 회장이 된 박건원을 불렀다. 세 사람은 색소폰도 불어보고 트럼본도 불어보며 연구를 했다. 그리고는 서로 마음을 합쳤다.
“우리가 한 번 악단을 만들어보면 좋겠어.”
그렇게 하여 제1색소폰에 백명곤, 피아노에 홍난파, 트럼본에 박건원, 보컬 이인선 등 8인조로 된 악단을 구성했다. 한국 최초의 재즈 악단인 코리안 재즈 밴드의 탄생이었다. 백명곤이 결성한 이 코리안 재즈 밴드가 1926년 2월 종로 청년회관에서 연주회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연주회였다. 그리하여 한국 재즈 음악의 역사가 백명곤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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