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역사 길상사 이야기 Ⅵ 평양 기업인 황경환이 매입하다
길상사 이야기 Ⅵ
평양 기업인 황경환이 매입하다
글 이정은
황경환과 배현도 부부 (1920년)
대동강 능라도(일제강점기 시기)
백인기의 사망
성북동 323번지 길상사 자리 별장 주인 백인기는 1942년 7월 1일 사망했다. 그가 사업상 관여한 업체를 다 열거할 수 없다. 그는 금융신탁업체인 경성흥산(京城興産) 주식회사(대표 박영효)의 주식 30%를 소유한 최대 주주였고, 상업 무역업체 ㈜조선물산 이사, 무연탄의 채굴 제조 및 판매회사인 ㈜조선무연탄 이사, 비료, 농구류 및 부동산 매매, 농업자금 융통 등의 농림업체 ㈜전북기업 대표였으며, 무엇보다 경성부 성북동 323번지 길상사 자리의 집을 주소지로 하여 아들 백명곤을 대표로 세운 5만석 농장관리를 위한 합명회사 화성사(華星社)의 실질적 주인이었다.
죽을 때 남은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해방 후 부인 이윤성은 48만 9256㎡(14만 8000평)의 땅으로 학교법인 화성학원(華星學院)을 설립하여 남성(南星)중학교를 개교했다. 1951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학제가 분리되면서 남성중학교와 남성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후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화약 수송 열차 폭발사고로 구교사가 파괴되자 지금의 소라산 부근 익산시 신동으로 이전하여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인기는 1913년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주도한 화폐정리사업에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21년 6월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의 전라북도 위원, 1922년 11월에는 친일 단체 조선구락부 발기인, 1925년 5월부터 1927년 5월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1927년 4월부터 1930년까지 관선 경기도 평의원을 지냈다.
1927년 6월 3일부터 1930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6년 6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조선실업구락부 상담역을 맡은 것 등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 명단에 아버지 백남신과 함께 포함되었다.
평양 기업인 황경환의 성북동 저택 인수
백인기의 사망 3년 후인 1945년 3월 성북동 323번지의 저택은 평양의 기업인 황경환(黃慶煥)이 매입했다. 황경환은 평안남도 양덕군 출신인데 16세에 평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강의록을 주문하여 독학하였다. 그 후 양덕군 금융조합에 들어가 서기로 근무하며 감리교회의 목사 배정일(裵貞一) 딸로서 이화학당에 다니고 있던 배현도(裵現道)를 만나 결혼하였다. 배현도는 결혼하면서 이화학당을 중퇴했다.
이후 황경환은 성천군 금융조합 이사로 승진했다. 1917년 두 사람 사이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이 아들이 후에 법학자 석우(石隅) 혹은 취현(翠玄) 황산덕(黃山德, 1917~1989)이다. 법학자 황산덕은 특히 법철학자로 유명하지만, 형법학자, 대학총장, 문교부 장관, 법무부 장관에다가 불교학자, 문필가, 등산가 등으로 관심과 활동의 폭이 넓었다.
23살의 황경환은 첫아들 황산덕이 3살 되던 1919년 3월 5일과 6일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에서 감리교 이윤영(李允榮) 목사 등과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이윤영 목사는 해방 후에 서울 종로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 개원기도를 한 사람이다.
이 사건으로 황경환은 이윤영 목사와 함께 기소되어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8월 28일 경성의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바람에 아내 배현도는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 와서 시아버지 황준식(黃俊植, 1861~1939)과 시어머니 청송 심씨(1864~1945)와 함께 살며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기를 4개월 앞두고 석방되었다. 출옥 후 황경환은 고베(神戶)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사상범 전과 자라는 이유로 얼마 안 가 해고되었고, 취업에 어려움이 있자 등짐장사로 생계를 이었다.
황경환 배현도 부부가 살았던 평양 대성학교 주변 약도
1924년 건립된 경성제국대학 예과 건물(청량리 소재로 지금의 미주아파트 자리)
그러다 황경환은 26세 때 소설가 김동인의 이복형이자 집안의 유산으로 큰 부자이며, 기독교인으로서 해방 후 신익희와 함께 대한민국 제헌국회(1948. 5. 31~1950. 5. 30) 부의장이 된 김동원(金東元, 1884~1951)이 경영하는 평안고무공업사에 취직했다. 황경환이 평안고무회사에 취직하자 가족들은 평양부 상수구리 77번지로 이사했고, 황경환은 해방될 때까지 고무신 제조업에 종사하였다.
1935년 4월 18살이 된 아들 황산덕이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갑류(文科甲類)에 전체 4등으로 입학했다. 3년 후인 1938년 3월 아들 황산덕은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학과 재학 중 아들은 황이선과 결혼했다.
이듬해인 1939년, 황경환은 김동원과 결별하고 젊은 부자 박승엽과 제휴하여 박승엽이 상속받은 세창고무공업사의 공동 경영주에 취임하게 되었다. 세창고무공장은 다 쓰러져가는 공장이었다. 황경환은 공장을 재건시키기 위해 당시에 생소했던 미국의 테일러(Taylor)의 이론을 도입하여 기업경영을 합리화하였다. 그러자 공장은 순식간에 크게 발전하여 서울의 대륙고무공업사 다음으로 전국에서 둘째가는 큰 공장이 되었다. 세창고무는 만주에까지 진출하여 중국 여성들의 발에 맞는 특이한 모양의 고무신을 개발하여 팔아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1941년 아들 황산덕은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6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하여 그해 10월 조선총독부에 채용되었다. 황산덕은 청송군청에 발령받아 근무하다 경북도청 원호과로 옮겨 대구에서 근무했다.
황경환은 그즈음 이런저런 상황이 겹쳐 아내가 이화학당에서 공부했던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해방을 5개월 앞둔 시점에 매입하게 된 서울의 살 집이 성북구323번지 백인기의 별장이었다.
황경환은 대구에서 근무하던 아들 황산덕이 올라오자 집구경을 시켜 주었다. 황산덕은 서울 성북동의 이 저택을 보고 놀랐다.
“마치 궁궐을 보는 것같이 커다란 저택이었다. 아래채는 내가 애들과 함께 있을 곳이고, 가운데 가옥은 선친께서 사실 집이며, 웃 사랑채는 일본식 건물로서 손님을 맞을 때에 쓸 곳이라는 등 선친의 설명이 자상하시었다.”
황산덕은 아버지의 서울 이사 결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서울에 올라와 사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시었다. 결과적인 일이지만 선친의 이 당시의 결단은 우리 모든 식구들을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옮기는 것은 권장되었으나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면적인 이사는 불가능하였고 우선 급한대로 한 트럭 분의 가재도구만 옮겨 놓았다. 곧 8·15해방을 맞았다. 8월 말에는 대구의 경북도청에 근무하며 대구에 살던 아들 황산덕 식구들도 서울로 올라와 같이 살게 되었다. 황산덕은 짐을 정리하여 대구에서 철도편으로 이삿짐을 부쳤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혼란 틈에 이삿짐이 몽땅 사라져 빈털터리가 된 채로 성북동의 대저택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아들 황산덕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집은 이제 서울로 그 본거지를 옮긴 것이다. 성북동에 있는 백인기씨 별장(전북 이리의 갑부)은 대지가 2만 평이 넘는 궁궐 같은 집이었는데 우리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이 집을 구입하여 수리해서 이사하기 시작하였다. 거의가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 아래 넓은 대지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세 채로 나누어진 기와건물에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이 어우러진 호화 주택이었다.”
황경환은 서울에 와서 친구 장진섭(張震燮)과 합작해 35만 원에 덕수궁 앞 반도호텔을 구입했다. 미군이 들어와 반도호텔을 미군정 청사로 빌려 쓰게 되자, 1945년 9월부터 임대료를 받으며 호텔 사무실에서 관리사무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1946년 2월 미군정 법령이 공포되어 반도호텔이 정부 귀속재산으로 강제 편입되었고, 대신에 영등포구 도림정(現 도림동)에 있던 조선타이어공장(現 한국타이어)의 관리인이 되었다.
황경환 부친 장례식(1939년 평양). 황경환의 아들 석우 황산덕(빨간색 원)
법적 분쟁 끝에 집을 내놓다
황경환 가족이 성북동 323번지에 사는 동안에 성북동 집에 말썽이 생겼다. 백인기 씨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그의 손자가 성북동 집을 가지고 있다가 판 것인데, 당시 그 손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백씨 집안의 친족회의의 동의를 얻어 매매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해방 후 그 손자가 전라남도 시골 어딘가에 있는 그의 고모의 동의가 빠졌다고 계약무효 소송을 걸어온 것이다.
2년의 재판 끝에 황경환 가족은 결국 패소하여 성북동 집을 내놓게 되었다. 때마침 평양에 있던 기림리 집이 팔리게 되어 그 돈으로 중구 을지로 4가에 있는 한국전력회사의 독신자 아파트로 사용되던 집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경환 가족의 성북동 저택살이는 몇 년의 짧은 기간으로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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