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호 역사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2) 새우 나라? 혹등고래의 나라!

2024.12.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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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적의 역사(2)

새우 나라? 혹등고래의 나라!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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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등고래




혹등고래

혹등고래는 영어로 humpback whale이다. humpback은 곱사등이라는 말인데, 고래 중 등이 곱사처럼 굽은 종류가 있어 혹등고래라 한다. 혹등고래는 고래 중 몸집이 가장 큰 종류는 아니다. 그래도 몸길이가 12~16m이고, 무게는 30톤이나 되는 중형 고래이다. 가슴에 긴 가슴지느러미가 있고 이 긴 지느러미를 이용하여 물 위로 뛰어올랐다 몸을 돌려 머리를 물에 처박는 브리칭(Breaching)이라는 동작을 하는데, 몸의 2/3 이상이 드러나게 뛰어오르는 역동적인 비상으로 고래 관찰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혹등고래는 협동한다. 여러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물속의 물고기 떼 아래에서 공기 방울을 내뿜으며 고기떼 주변을 빙빙 돈다. 점차 원의 크기를 줄여가며 물고기를 수면으로 몰아 물고기를 들이마시듯 먹는다.


혹등고래는 음악을 안다. 고래 중에서 가장 소리를 잘 내고, 다양한 소리를 ‘노래’로 배열한다. 그 노래는 짧은 것은 4분에서 긴 것은 35분간 계속되기도 한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복잡한 곡조를 가진 노래라 한다.


혹등고래는 평화적이다.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어나 공격적인 범고래로부터 인간이나 물개 등 다른 종류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 혹등고래는 글로벌한 대양을 무대로 생활한다. 극지방의 바다에서 크릴새우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살다가 출산과 어린 새끼를 키우기 위해 적도 근처 열대 또는 아열대 따뜻한 바다로 긴 여행을 한다. 그 거리가 최대 1만6000㎞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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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비고(불)의 1904~1905년 경 대한제국 ‘새우의 나라’ 상황 카툰(보스톤미술관 소장)



이처럼 혹등고래는 무시할 수 없는 몸집, 역동성, 협동, 문화, 평화적, 글로벌한 생활무대가 꼭 한민족을 닮았다.


‘새우의 나라’ 의식을 버려야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나라를 ‘새우의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역사를 이야기할 땐 으레 수백 번 주변 강국들로부터 침략을 당해 왔다는 피해의식을 이야기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 식민지 지배의 굴욕과 고통, 강대국에 의한 원치 않은 국토와 민족의 분단, 3년간의 6·25 전쟁, 전쟁의 결과로 남은 잿더미와 뿌리 깊은 상처, 봄이 되면 양식이 떨어져 오는 굶주림의 보릿고개, 초근목피 즉 풀뿌리 나무껍질로 허기를 달래어야 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저개발 농업국가가 대한민국 지난날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새우의 나라’ 피해의식 때문에 지금도 일본에 대한 원망과 피해 감정을 풀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바로 옆에 중국과 일본이 있다. 일본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때 우리는 중국과 손잡아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 중국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때 일본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음을 냉철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도 이렇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활용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약소국 의식 때문이다. 약소국 새우의식 때문에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한국 역사에서 우리가 강하고 우리가 잘 대비하면 주변 어떤 나라도 우리를 침략하거나 굴복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인이 사는 터전은 주변국이 쉽게 침략할 수 없는 땅이다. 북방은 압록강, 두만강이라는 큰 강이 자연적 방어선이 되고 있다. 그 너머에는 장백산맥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압록강 두만강 아래는 강남산맥·적유령산맥·묘향산맥·언진산맥·멸악산맥·함경산맥이 첩첩이 뻗어 몇 겹의 장벽을 치고 있다. 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외적이 쉽사리 공격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라는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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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중앙청 광장에서 미군들이 도열한 가운데 일장기가 내려지는 장면




침략자는 나쁘다. 그러나 국가의 안전을 주변국의 도덕성과 자비심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의 지도층이 어둡고, 부패했으며, 내부 권력투쟁과 작은 이권에 매몰되어 인재를 올바로 쓰지 못했고, 주변 정세변화에 눈을 감고 국방을 소홀히 한 결과침략을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같은 명장을 삭탈관직하고 백의종군하게 한 선조를 보라! 주변국의 침략은 우리가 방심하여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자초한 결과가 되어 스스로 ‘새우’의 운명 속으로 빠져들어 고난을 겪었다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남을 원망만 하는 역사를 가르친다. 다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새우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한 주변 정세를 주도적, 선제적으로 관리하여 위기 대비를 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타국의 호의와 자비, 비현실적 도덕심에 의존하는 ‘새우의 나라’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혹등고래의 나라

지난날 세계 최고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하고, IT 등 최첨단 산업, 세계를 선도하는 조선, 자동차,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국이 되었다. 군인들 철모나 밥통도 만들지 못했던 나라가 기관총, 자주포, 전차, 미사일, 최신 이지스 전함과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방위산업 강국이 되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소비국이었고, 외국 가수들의 노래 가사를 발음 나는 대로 한글로 적어서 따라 부르던 문화 소비국에서 자국의 드라마, 영화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자국 출신 공연기획가 가수들이 세계 정상을 달리며 지구상에 한류라는 문화적 물결을 일으키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한국을 동경하며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50년간 세계 100여 개 중간소득 국가 중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 중 제조업과 수천 만 국민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라는 것을 지난 호에서 언급했다. 대한민국은 더이상 강대국 고래들 사이에 끼어서 등이 터지는 ‘새우의 나라’가 아니다. 글로벌한 무대에서 문화를 노래하며 자신을 물 위로 한껏 도약하는 혹등고래의 나라다.


이제 한국인들은 가슴을 펴고 ‘새우의식’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우리나라를 ‘혹등고래의 나라’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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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허리를 자른 38선 표지판




섬 아닌 섬 대한민국이 살 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발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35년 동안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었던 한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 선이 곧 사람과 물자, 전기가 오갈 수 없는 철의 분단선이 되었다.


1948년 신생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석탄, 철 등 광물 자원, 수풍, 부전강과 허천강 등발전소, 흥남 비료공장, 송림 제철소 같은 주요 산업시설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다. 남은 것은 헐벗은 산하에 인구가 조밀한 농업지대 뿐이었다. 노년기 척박한 농지에서 산출되는 식량은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봄이 되면 대부분의 가정에 양식이 떨어져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막막한 나라였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다. 공산국가 소련, 공산국가 중국, 공산국가 북한이 북방에서 공산주의 대륙연합 세력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한민족의 역사적 무대였고 1500년간 문화적 교류의 통로였던 대륙으로 통하는 길이 봉쇄되었다. 대한민국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살길은 바다, 해양을 통한 길밖에 없었다. 자급자족, 자력갱생이 불가능하여 미국, 일본, 영국 등 해양국가들과 시장경제, 대외개방적인 무역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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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피난민. 가족과 살아남기 위해 죽기살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황

신생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졌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침략을 미리 준비해 온 북한과 이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2달 만에 경기, 강원, 충청, 전라남북도를 비롯하여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 점령하에 떨어지면서 대구-부산-마산의 낙동강 안쪽만 남아 최후의 전선을 형성했다.


대한민국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에 몰렸다. UN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만회하고 현재의 휴전선으로 국토를 회복했지만, 3년간 남쪽 낙동강 전선에서 북쪽 압록강까지 오간 치열한 공방전은 그러잖아도 가난했던 나라를 아예 잿더미로 만들었다. 수백만 피난민이 발생했고, 생활 터전을 잃은 국민들은 무엇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에버릿 E. 헤이건(사진. Everett Einar Hagen, 1906~1992)이라는 학자는 일찍이 올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비슷하게 <사회변동에 관하여: 경제성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On the Theory of Social Change: How Economic Growth Begins. Homewood, Ill: Dorsey Press, 1962. Print)>라는 책을 내어 저개발국가의 경제성장 문제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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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UN 판무관으로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봉사하며 저개발 지역의 경제성장 문제를 관할한 결과,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경제개발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며 전란, 혁명 등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으로 피난 등으로 기존의 생활 터전을 잃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하는 지역에서 경제개발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한민국이 그런 경우였다. 죽기 살기로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던 까닭에 기적의 반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거기에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자유와 개방체제가 개인의 역량을 한껏 펼치게 했다.


작은 시작, 큰 결실-인개 개발 투자

2014년 10월 31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조금 드문 안장식이 있었다. 보통은 국립현충원에 독립유공자나 군인과 소방관 등 국방과 사회 안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모신다. 그런데 그날의 안장식은 대한민국산업발전에 공헌한 과학기술인 김재관(사진) 박사를 모시는 행사였다.


김재관 박사는 신생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가 막 전란이 끝난 피폐한 가운데서도 미래를 위한 인재 육성에 투자하여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김재관(金在官, 1933~2017)은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공대 기계과 1학년 학생이었다. 부산으로 피난해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생활을 위해 미군 부대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무기가 특수강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강한 나라를 위해서는 특수강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김재관은 195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은행 취업과 함께 독일 정부 장학생 선발 시험에도 동시에 합격했다. 가난했던 그 시절 공부를 위해서 직장을 버릴 것인가, 직장을 위해 공부를 포기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다. 


이승만 정부와 산업은행은 김재관에게 유학기간 중 산업은행의 급여를 계속 지급하여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 주었다.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도 국가와 사회가 미래를 위한 인재 육성이라는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독일 유학을 떠난 김재관은 1956~1958년 서독의 뮌헨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1958~1961년 같은 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뒤셀도르프의 데마그(Demag) 건설 장비 제조 업체 종합기회실과, 뮌헨공과대학 대학원 연구실 등에서 근무하며 제철소와 철강산업 전반에 대한 식견을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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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과 김재관

1964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쾰른 공항에 내렸다. 당시 우리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어 서독이 보내준 루프트한자 여객기에 일반 승객 60여 명과 함께 타고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 로마를 경유하여 28시간 만에 도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간 것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으로

독일 정부 차관을 얻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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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의 뮌헨 유학생 교민 조찬회



박정희 대통령은 당초 “자력갱생”을 기치로 내걸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자원도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자력갱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수출 제1주의’로 정책 기조를 전환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을 육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피폐한 대한민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은 “밀가루와 설탕 등 무상원조 대상국에 차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일본과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패 전국의 잿더미에서 일어선 서독에 기대를 걸었다. 인력수출로 광부와 간호원을 보낸 서독에 가서 의회에서 “돈을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갚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서독은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4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서독 방문 기간 중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10일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함보른 광산을 방문하고,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는 눈물의 모임을 가진 사흘 뒤 뮌헨에서 유학생을 포함한 교포들과 조찬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재관 박사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관한 계획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계획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3년 뒤인 19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고 해외 과학자들을 유치할 때 김재관 박사를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로 지명하여 귀국하게 했다. 이리하여 김재관 박사는 산업의 쌀이라고 하는 철강 생산을 위한 ‘포항종합제철소’ 건립의 기획과 설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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