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호 역사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3)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1)

26일 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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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적의 역사(3)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1)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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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4년 12월 13일 아침 뮌헨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교민과 유학생 초청 조찬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제철소 계획안을 올린 김재관 박사는 1967년 첫 대한민국 유치 해외 과학자 18명 중 한 사람으로 그가 꿈꾸어 왔던 조국의 철강산업을 위해 귀국했다.


그가 뮌헨에서 유학하던 1956~1966년 기간 동안 고국은 안으로는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복구와 경제 재건, 밖으로는 북한과의 체제경쟁 압박과 안보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 국방력 강화 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재관 박사의 유학에 정부와 산업은행이 급료를 지급하여 유학할 수 있게 한 것은 휴전 후 3년간 이러한 피나는 노력으로 남한 사회의 생산력이 6·25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면도 있었다.


김재관 박사가 독일 유학을 떠난 1956년 이승만 정부는 장기 경제개발계획 시안을 작성하고 2년 후인 1958년 4월 경제개발계획을 전담할 산업개발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산업개발위원회는 그로부터 꼬박 2년간 준비하여 1960년 4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장기적으로 경제자립을 목표로 하면서, 민간에서 추진하기 어려운 중화학공업을 국가가 추진하고자 하는 포부도 담았었다. 그러나 곧이어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져 실현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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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아침 서울시청 앞의 박정희 소장과 군사혁명 주체들




1960년 4·19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정부도 경제개발의 비전과 방향을 정립했다. 이때 미국의 경제학자로서 특히 아시아 경제전문가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의 하나인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 선임 경제고문인 찰스 울프 2세(Charles Wolf Jr, 1924~2016)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화 열기가 지나쳐서 매일같이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저물었다.


민주당 내부 또한 신파 구파로 갈라져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불안정했던 장면 정부가 경제개발을 위해 더 구체적인 실행계획이나, 추진을 엄두도 내지 못한 상태에서 1년 1개월만인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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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찰스 울프 2세



박정희 군사정부는 국가의 전 역량을 경제개발에 집중했다. 우선 자유당 정부의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편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했다. 경제기획원은 부흥부에서 만든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참고하여 발족 7개월 만인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발표했다. 원래 경제개발계획은 소련 같은 공산권에서 하는 계획경제로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나 기술도, 그리고 자본도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하루바삐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국가가 재원과 수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계획경제를 추진하게 되었다. 박정희 장군은 집무실 옆 방에 전시처럼 상황실을 마련하여 투명 비닐로 씌운 부문별 계획표를 회전식으로 설치하여 수시로 진척 상황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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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장군




김재관 박사가 귀국하기 전 해인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났다. 결과는 당초 연평균 7.1%의 경제성장률 목표를 7.8%로 초과 달성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달러에서 126달러가 되었다. 재일교포들이 2500만 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중고 시설을 국내 반입했고 국내의 싼 인건비를 활용하여 의류 봉제품, 가발, 전기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한 것이 초과 달성에 큰 힘이 되었다. 1964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를 기념하여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하고, 매년 우수한 실적을 낸 업체를 표창하며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본격화했다.


종합제철소의 추진

제철공장은 크게 종합제철소와 독립제강공장 두 가지로 나뉜다. 선강일관공장(일관 제철소) 즉 종합제철소는 높이 100m 가량의 고로(高爐, 용광로)에 철광석과 코크스를 투입하고 1500도의 열풍을 불어넣어 철광석에서 불순물과 산소를 분리한 쇳물(선철)을 만들고, 이것을 강괴로 만드는 제강을 거쳐 강괴를 다시 강재로 만드는 3단계의 생산 공정을 갖췄다. 독립제강공장은 고철, 환원철, 선철 등을 녹여 제강 후 강재를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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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피츠버그 제철단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1965.5.5)




그전까지 우리나라에는 고철을 녹여 철 제품을 만드는 전기로(電氣爐) 제강업체만 있었다. 전쟁통에 흔했던 고철을 녹여 철근, 못, 볼트, 너트 등으로 재활용하는 것으로, 소규모로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을 산업의 쌀로서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종합제철소가 꼭 필요했다.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 철강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간 선철 20만 톤 생산을 목표로 종합 제철 건설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13일 김재관 박사로부터 종합 제철 계획서를 받고 돌아와 곧 맞이한 1965년 새해에 종합제철소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철소 건설 자금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공모했다. 그러나 목표액 33억 원의 0.4%인 1300만 원이 모였다. 그러자 국내외에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은 무모한 일이라며 반대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과 국제단체에서는 이를 군사정부의 정권 과시용 사업이라고 의심의 눈으로 보았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공식 방문길에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사의 포이(F. Foy) 회장을 만나 제철소 건설 의사를 전하며 협조를 구했다. 포이 회장은 국제제철차관단을 만들어 종합제철소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11일, 미국 피츠버그의 코퍼스(Koppers Company. Inc.)가 주축이 되어 블로녹스(Blaw-Knox Company),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 Electric International Company) 등 미국의 3개 사(社)와 독일의 데마그(Demag Aktiengesellschaft), 지멘스(Siemens-Schuckertwerke) 등 2개 사, 영국의 웰먼(The Wellman Engineering Corporation), 이탈리아의 임피안티(Societa Italiana Impianti) 등 4개국 7개 사가 모여 이른바 KISA 즉 대한국제제철차관단(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출범했다. 이들은 12월 6일부터 며칠 동안 회의를 열고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을 지원한다는 데 합의했다. 한 달쯤 후 프랑스의 엥시드(ENSID.SA.)가 합류, 차관단은 5개국 8개 사로 늘어났다. ‘종합제철소’의 꿈이 다가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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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행기에서 본 포항종합제철 건설 부지. 건너편이 포항시가지(1970.4.1)



1967년 10월 3일 1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현 포항시 남구)에서 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며칠 후인 1967년 10월 20일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정부는 KISA와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 전문 45개 조에, 1차로 조강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에 완공하며 그 후 300만 톤급으로 확장할 수 있게 설계하기로 돼 있었다. 건설자금은 1억 3070만 2000달러(외자 9570만 2000달러, 내자 3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이 협정은 기술용역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건설자금에 관해서는 막연하게 차관 확보를 지원한다고만 되어 있을 뿐 자금 규모와 조달 시기, KISA 회원사들 사이의 지원 자금 배분 등이 명시되지 않았다. 외자 도입을 위해 1년 넘게 KISA와 협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외자 1억 900만 달러 중 도입이 확정된 것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합해 4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미국과 서독은 차관 공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968년 11월, 차관 공여 주체인 미국 수출입은행이 세계은행(IBRD)에 한국 정부의 차관요청에 대한 심사를 의뢰했다. IBRD는 한국의 종합 제철사업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KISA는 IBRD의 전망에 근거하여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세계 철강업계와 금융기관들은 후진국 대한민국에다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이 성공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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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1차 기공식에 참석하는 주민들(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1967.10.3) (출처: 매일아카이빙센터)




정부 측 협상단과 박태준 등 포항제철 실무협상단이 피츠버그로 달려갔다. 이들은 포이 회장을 비롯해 KISA 회원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한국의 경제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KISA는 제철소 건설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바꾸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이미 그들의 약속을 믿고 포항벌 수백만 평에 부지를 조성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KISA는 와해되고 여론은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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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1969년 1월 하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이 무산될 위기를 맞아 낙담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은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다. 하와이 해변을 걸으면서 박태준은 이 난국을 타개할 하나의 묘책을 떠올렸다. 박태준은 곧바로 콘도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를 올렸다. “미국에서 협상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轉用)하는 것입니다.”


대일청구권자금이란 1965년 6월 22일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일본이 대한민국에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입은 피해 배상의 차원에서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재정차관자금 2억 달러 그리고 상업차관 3억 달러와 금액을 밝히지 않은 플러스 알파의 상업차관을 말한다. 그중 농수산 지원 용도 등으로 사용하기로 한 자금을 제철소 건설로 돌려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였다. 이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기막힌 아이디어군. 대일 청구권 자금이 1억 달러는 남아있을 거야. 일본 정부는 임자가 설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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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1차 기공식(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1967.10.3) (출처: 매일아카이빙센터)




대일 청구권 자금 중 갚을 필요 없는 무상자금은 농업, 임업, 수산업의 진흥과 원자재 및 용역의 도입 등의 사업에, 갚아야 하는 유상자금은 중소기업, 광업과 기간산업 및 사회간접자본 부문의 확충사업으로 정해져 있었다. 소양강댐 건설(2160만 달러), 경부고속도로(690만 달러)도 이 자금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에 마련할 길이 없었던 1억 달러 이상의 포항종합제철 건설자금을 여기서 전용하여 조달할 착상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일본을 설득하여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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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경제기획원 장관




1969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은 박충훈 부총리를 해임하고 김학렬 청와대 경제수석을 새 부총리로 임명하며 종합제철 추진 지휘부를 새롭게 개편했다. 신임 김학렬 부총리는 외국의 용역기관에 의존하는 대신 우리 힘으로 새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종합제철 건설 사업 타당성을 일본에 설득하여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김재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철강연구실장이 그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최형섭 KIST 소장은 윤여경 경제분석실장을 불러 김재관 박사를 돕도록 했다.


종합제철 사업계획서 작성에 필요한 기술적인 자료는 김재관 박사가 독일 유학시절부터 다년간 수집해 놓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외국 금융기관이 납득할 수 있는 사업계획서를 뒷받침하는 체계화된 경제, 산업 관련 통계자료가 필요했다. 특히 종합제철과 같이 산업의 전 부면에 걸친 프로젝트의 시장조사는 전국의 모든 산업을 커버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산업 통계자료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다. 이 사업을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이 신뢰성 있는 자료를 수집,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윤여경 실장은 김재관 박사와 같이 1968년 KIST의 재외 과학기술자 유치계획의 제1차 유치 과학자 18명 중의 한 사람으로 귀국해 경제분석실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1960년 미국 유타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퍼듀대학에서 산업경제학을 전공한 뒤 1962년부터 미국 노던 일리노이 가스컴퍼니에서 경제분석직으로 일해 왔다. 주로 투자 타당성 검토, 시장 개척 및 판매전략 수립 업무를 담당하면서 입사 6년 만에 애널리스트에서 슈퍼바이저를 거쳐 매니저로 초고속 승진한 경제분석 분야의 ‘울트라 엑스퍼트’로 불리기도 했다.


전국적인 자료수집을 위해 김학렬 부총리에게 건의하여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을 구성했다. 정문도 기획차관보가 단장, 노인환 공공차관과장이 간사로 하여 경제기획원, 상공부, KIST,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 경제과학심의회의 등에서 차출된 15명과 포항제철에서는 노중렬, 김학기, 최주선, 조용선 4인이 참여했다. KIS T에서는 김재관 박사와 윤여경 실장이 참여했다. 그 회의에서 김재관 실장은 기술 분야 반장을, 윤여경 실장은 경제적 타당성 분야 반장을 맡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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