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호 역사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3)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2)

2025.03.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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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3)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2)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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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 내의 종합제철사업계획서 작성 전담반



일본 측 협력 의사 타진

1968년 하반기에 들어 KISA(대한국제제철차관단,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의 종합제철 설립계획 안으로는 종합제철 건설이 전혀 가망성이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1968년 8월 27~29일간 도쿄에서 한일 정기 각료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김정렴 상공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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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경제기획원 장관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일본의 협력 의사를 타진해 보시오.”


도쿄에서 김학렬 부총리는 외무 및 경제기획 합동회의를 맡았다. 김정렴상공부 장관은 실질적인 협력의 열쇠를 가진 일본 통산성 대신(장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당시 경제기획청 조정국장으로 몇 달 후인 1969년 통산성 중공업 국장을 맡게 되는 아카자와 쇼이치(赤澤璋一) 등을 맡아 공석, 사석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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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 상공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의 최장수 비서실장.



일본 측은 ‘일본 제품을 팔려는 속셈이 아니라 진심으로’ 종합제철 규모가 워낙 작아 국제 가격 기준의 제품을 생산할 수 없으므로 일본의 철강제품을 사서 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한국 측은 국내 수요도 연간 100만톤이 가까우며, 제철소 규모를 100만톤으로 늘리고 도로·철도·항만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을 정부 예산으로 지원할 것이며 일본의 무상자금을 활용하여 건설하면 충분히 경제성이 있다는 점을 설득했다. 이런 끈질긴 노력 끝에 일본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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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통산성 대신(장관)



그러나 KISA의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일본 측은 KISA가 있는 상태에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한국 측의 끈질긴 요청으로 일본은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그해 9월 중순 니혼강관의 도야마를 단장으로 하여 일본 6개 철강기업들이 추천한 조사단 10명이 서울에 왔다. 일본조사단의 임무는 서양인들이 내놓을 타당성 조사에 대한 ‘정확성’을 검증할 최적의 비교자료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일본 조사단의 일원으로 온 아카자와 쇼이치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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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자와 쇼이치 일본

통산성 중공업국장



“나는 이 정도의 차관 규모로, 이 정도의 이자를 지불하면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종합제철소이기 때문에 고로는 이탈리아, 전로(轉爐)는 독일, 압연은 오스트리아, 미국 등 제각각의 기술이었는데… 일관적인 기술체계를 필요로 하는 종합제철소가 잘될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일본 정부로서는 참여하기 어렵다는 뜻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으며 참가를 검토하던 일본의 후지제철과 야와타제철의 수뇌부에게도 정부의 뜻을 전했다.”


독자 종합제철 설립계획과 타당성 입증 준비작업

이듬해인 1969년 4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3차 대한(對韓) 국제경제협력기구(IECOK) 회의에서 세계은행은 한국의 종합제철건설에 대해 공개적으로 난색을 표했다. 5월에는 미국 수출입은행도 한국에 대한 차관 공여를 거부했다. 외자 확보가 벽에 부딪히자 6월에 KISA(대한국제제철차관단)도 해체되었다.


일본의 협조를 구하는 것 외에 길이 없었다. 정부는 이자 부담이 없는 일본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기로 방향을 전환하고, 일본 측의 협력을 구하기로 했다. 문제는 일본이 인정할 만한 설득력을 갖춘 사업계획서와 타당성 분석 자료의 뒷받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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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KIST경제분석 실장



이를 위해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을 설치했다. 여기에 KIST 김재관 철강연구실장은 기술 분야 반장을, 윤여경 경제분석실장은 경제적 타당성 분야 반장을 맡았다.


윤여경 실장이 이끄는 KIST의 경제분석팀은 KISA의 종합제철 설립계획이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분석했다. 그 결과 다섯 가지로 분석할 수 있었다.


1) KISA의 전근대식 설비에, 조강 기준 연 60만 톤 생산 규모는 생산성과 경제성이 없었다.

2) KISA는 경제성을 보완하기 위해 항만·통신·용수 및 전기 시설을 정부 부담으로 계획했다. 이미 공단조성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3) KISA는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전기 및 용수 공급 가격을 파격적인 특별 요금으로 계상했다.

4) KISA는 경제성을 맞추기 위해 철근 등을 생산 및 판매할 계획을 포함시켰다.

5) KISA 계획안 대로 하면 기존 철강업계에 타격을 준다.


위와 같은 요소 때문에 국제 금융기관들은 강력한 반대 의견을 낸 것이었다. 김재관 윤여경 박사의 KIST팀은 전담반 두 번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방향을 제안했다.


1) 철강재의 수요가 언제, 얼마나, 왜 필요한가를 가능한 한 철저히 규명한다.

2) 제철소의 기계 시설은 철강재 형태별 수요에 맞추어 경제성 있는 최소 규모로 선정하되 미래의 확장 계획을 신중히 고려한다.

3) 제철소는 최종제품이 아닌 중간제품을 생산한다. 그리하여 기존 국내 제강업계가 수입해서 쓰던 원자재를 국산화하여 원활하고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부각시킨다(원자재 수입대체 효과).

4) 정부가 제반 지원시설에 투자하되 그 지역사회 발전을 전제로 수립하고 추진되어야 한다. 


전담반은 검토와 토론을 거쳐 KIST가 제안한 기본 방향을 전담반의 업무 추진 기본 방침으로 확장시켰다. 전담반의 작업은 국제 경쟁력이 있는 최소 단위의 종합제철소 건설의 타당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김재관 박사는 조강 기준 연간 100만 톤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종합제철소의 최소 단위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경제분석실에서는 일단 조강 기준 100만 톤 수요에 다다르는 연도를 예측하기로 하고, 김재관 박사팀에서는 조강 기준 100만 톤의 설비를 계획하기로 했다.


윤여경 박사팀은 거시적 분석으로 우리나라의 1인당 GNP, 1인당 철강재 소비량, 1인당 자동차 보유 대수 등 여러 가지 경제 및 산업 지표를 일본의 과거 자료와 비교 검토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약 20~25년 뒤져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1950년대 초반의 일본 철강공업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수입 통계와 생산 통계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국내 철강재 수요 자료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1970년 말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가 100만톤이 훨씬 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미시적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윤여경 박사가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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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1차 기공식-3(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출처: 매일아카이빙센터, 1967.10.3



“그런데 미시적 수요예측 작업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가 전혀 없다는 문제에 부딪혔어요. 다행히 상공부 김철 철강 계장이 수집해 놓은 일본 자료가 충분히 있었어요.”


한국은행과 산업은행팀이 확보하고 있었던 일본의 1950년대 I-O 테이블(Input-Output Table)1)도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 산업계의 철강재 수요를 예측하여 수입대체 사업으로서 종합제철 사업의 타당성을 정리했다. 윤여경 박사는 말했다.


“(제철소의) 기업 측면에서의 타당성은 수요예측을 바탕으로 제품별 생산 규모가 결정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김재관 박사의 전문적인 안목과 식견이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설 규모 결정, 생산시설 선정에서부터 투자비 산출은 물론 제조원가의 추정까지 가능하게 했습니다.”


전담반에서는 또한 정부에서 직접 투자할 도로, 철도, 항만 등 지원시설의 타당성, 철광석과 원료탄의 장기 공급계약을 통한 조기 확보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또한 제품의 판매 가격을 결정할때 수입 가격보다 5~10% 정도 낮게 책정하게 했다. 이런 계획을 통하여 하나의 기업으로서 (수익을 내어) 자립 가능한 제철소라는 걸 입증하려 했다. 이러한 치밀한 분석과 현실적인 대안을 고품격 역사·문화잡지 글마루 35마련함으로써 나중에 포항제철이 세워졌을 때 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철소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가진 김재관 박사의 기여에 대해 윤여경 박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재관 박사는 밤을 새우며 시설 투자비를 줄이기 위해 제조 원 단위를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설비를 선정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추정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해서 외자 1억 2370만 달러, 내자 633억 원이 소요되는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사업계획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지금도 포스코가 1973년 103만 톤으로 출범했다는 기록을 볼 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도쿄 한일경제장관회의

1969년 7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제철 관련 최종 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 KIST의 김재관과 윤여경 박사도 기술 담당 및 타당성 검토 책임자로서 참석했다. 김학렬 부총리는 외자 1억 2370만 달러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조달할 것임을 보고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타당성 검토는 후지(후에 신일본제철로 합병), 야하다, 일본 강관 등 3사의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가 기술적 타당성 검토팀과 경제적 타당성 검토팀으로 구성되어 검토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정부는 일본에 파견할 태스크포스(TF)를 경제기획원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여 노인환 공공차관과장, 김철 철강계장, 김재관 박사와 윤여경 박사로 구성했다. 김재관 박사는 기술적 타당성 검토 설명을, 윤여경 박사는 경제적 타당성 검토 설명을 맡았다.


윤여경 박사가 경제적 타당성 검토 섹션에 들어섰을 때 10여 명의 일본 최고 전문가들이 우리측에서 작성한 ‘포항제철소 건설계획’을 일본어로 번역해 면밀하게 검토한 듯 군데군데 빨간 메모가 되어 있는 자료를 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은 윤여경 박사의 회고이다.


“나는 영어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고 회의를 영어로 진행할 것을 정중히 요청하여 양해를 받았습니다. 나는 수요예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나 한국에는 산업통계 자료가 없어서 양국의 1인당 GNP, 1인당 철강 소비량, 1인당 전력소비량 등의 자료를 비교한 결과 한국 경제는 일본에 20~25년 뒤져 있다는 결론에 따라 일본의 1950년대 경제 관련 자료를 많이 참고했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 생산성본부에서 발행한 ‘I-O 테이블’을 사용해서 철강재별 수요를 예측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역산하여 조강 연산 103만 톤이란 결과를 도출했으며, 이에 따른 공장별 규모를 도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일본 전문가들이 일본어 번역본 사업계획서는 덮어놓고 윤여경 박사가 I-O테이블을 활용하여 수요를 예측한 방법에 관심을 집중했다. 설명이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모두가 I-O 테이블을 사용해서 수요예측을 한 방법과 가정(假定)에 관계된 질문이었다. 모임 후 그들은 KIST의 수요예측 방법이 처음 접하는 새롭고 합리적인 방법이었기에 매우 인상 깊었다고들 말했다. 이리하여 경제적 타당성 검토는 ‘철강재 수요예측 방법’에 대한 강의가 되어 1시간 30분 만에 끝나버렸다.


“너무나 뜻밖의 성과였습니다. 기술적 타당성 검토 섹션은 3시간 정도의 격론을 거친 후에야 결론이 났습니다. 김재관 박사가 많은 일본 전문가들을 혼자 상대하면서 어렵게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결국 선진국의 일류 컨설팅 회사가 작성했지만 세계은행, IECOK 등으로부터 거부당한 사업계획 타당성을 KIST가 새로 작성하여 성공시킨 것이었다. 한일 경제각료회의는 대일청구권자금의 사용 합의로 이어졌다. 김학렬 부총리는 공식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KIST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이 계획서가 타당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정부가 지금까지 KIST에 투자한 자금을 모두 회수한 것과 같습니다.”


김재관 박사의 공헌

윤여경 박사는 이 과정에서 김재관 박사의 공헌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국에 종합제철 전문가는 김재관 박사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공칭 조강 연산 103만 톤이란 숫자도 김재관 박사의 자료에 근거를 두고 경제분석실에서 도출한 것이고 용광로, 압연공장, 후판공장 등 주요 시설의 배치도 그가 직접 포항에 내려가 도면을 보면서 허허벌판의 부지 위에 박은 말뚝들이 표준이 되었습니다. 원료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설비 제작 이전에 호주와의 원료탄 및 철광석의 장기 공급계약 체결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김재관 박사였습니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구매하는 설비는 일본 전문가가 추천하는 일본 설비를 우선적으로 선정한다는 암묵적인 양해가 있었다. 한국 측에 제철 설비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다면 일본 측 주장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김재관 박사의 진가가 드러났다.


“핫코일을 생산할 압연설비의 폭을 결정할 때 일본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의 산업발전 단계에 비추어 볼 때 협폭(狹幅)으로 하는 것이 경제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김재관 박사는 일본 측의 주장대로 하면 세탁기나 소형 냉장고 소재밖에 생산할 수 없는데, 한국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동차 생산을 못한다는 법이 없으니 최소한 소형 자동차용 강판까지는 생산할 수 있는 정도의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해 그대로 관철되었습니다.”


“후판의 두께를 두고 김 박사와 일본인 전문가들 사이에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김 박사는 ‘지금 내가 주장하는 두께의 후판은 선박용 후판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설비 가격이 비싸진다는 일본 전문가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어요. 그땐 일본 측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협상에서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 박사가 나를 찾아와서 한일공동구매추진위원회를 사임하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두께의 후판공장이 아니면 더이상 위원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김 박사와 나는 사임서를 냈습니다. 이는 KTIS의 위원회 탈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국내외 분위기로 보아 KIST의 위원회 탈퇴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박태준 사장이 중재에 나서 일본 측의 양보를 얻어 냄으로써 이 문제도 일단락되었습니다.”


후판생산 설비를 갖춤으로써 자동자, 조선 등의 산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포항제철 사업은 엔지니어링 중심의 턴키베이스 플랜트 기술도입 사업으로, 김재관 박사가 있어서 효율적인 기술도입을 성공시켰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7~8년간 꾸준히 자료 수집과 분석을 해온 김재관 박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김 박사가 없었더라면 포스코의 기술도입은 최소한 5년 이상 지연되었을 것이고, 외자도 최소 30% 이상 추가로 소요되었을 겁니다. 설비도 최신설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6·25전쟁 후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학 기간에 산업은행 월급을 지급하여 인재 한 사람 키운 결과가 이렇게 국가를 위해 크게 쓰임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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