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호 역사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4)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4)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1)
글 이정은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방문한 박정희(오른쪽) 대통령에게 KIST에서 개발한 제품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최형섭(왼쪽) 과학기술처 장관
1965년 5월 방미 환영만찬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대통령
월남 파병과 박정희 대통령 미국 방문
한국 철강산업의 밑그림을 그렸던 김재관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해외 초빙 과학기술자로 고국으로 돌아와 제철, 조선, 자동차 등 중공업 발전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여 몸담게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에 대한 감사 표시로 미국이 제안하여 이루어졌다.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에 국빈 초청하여 가진 한미정상회담 자리에서 깜짝 선물로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월남 참전과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한국 정부가 미국에 제안해 온 사안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 곤혹스러운 상황에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 했다.
그러다 1964년 8월 미국의 해군 USS 매독스함이 북베트남 월맹 영해로 들어갔다가 월맹군의 공격을 받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의회는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하면서 전쟁은 확전 국면으로 돌입했다.
박정희 정부는 월남전의 확대가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 배치로 이어질까 봐 크게 우려했다. 우리 안보에 큰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 나아가 우리 군이 전투 경험을 쌓아 전투력을 강화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하며 파월장병들의 급료와 전쟁물자의 수출과 수송 및 현지 건설사업 등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여 경제발전 기회로 활용하고자 미국에 한국군의 파병을 제안하고 있었다.
1970년 갓 운영을 시작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는 세계적 공학학술행사인
국제전기전자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전임 케네디 정부는 이를 무시 또는 거부했다. 그러나 존슨 정부는 전쟁 확대 정책을 취하면서 미국 단독으로 베트남전을 치르는 것에 명분과 국제여론, 사상자 속출에 따른 여론의 악화, 전쟁을 승리로 종결시키는 데 한계를 느꼈다. 우방의 지원과 다수 국가가 참전하여 지지하는 모양새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파병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1964년 9월 1차로 130명의 한국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견했다. 3개월 뒤인 1964년 12월 19일 미국은 비전투 병력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공병대인 비둘기 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한국 정부의 전투부대 파견 제의를 거부하던 미국 정부의 생각도 변했다. 1965년 4월 1일과 2일에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 연석회의에서 미군 15만 명과 한국군 2만 1000여 명의 남베트남(월남) 파병이 결정되었다. 그와 함께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빈 초청했다.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는 한국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고, 뉴욕과 워싱턴에서 성대한 환영 퍼레이드까지 해주는 등 극진한 환대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도널드 에프 호니그(Donald F. Hornig)는 존슨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지어주는 선물을 주면 어떻겠습니까?”
존슨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한미정상회담 자리에서 의제에 없던 연구소 설립 선물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즉석 제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인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연구소를 설립할 막대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국의 지원 하에 과학기술연구원 설립이 결정되었다.
한미간의 이견 조율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 몇 달 후인 1965년 12월 15일 미국 정부의 용역으로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 에드워드 슬로터 부소장을 비롯한 조사단 5명이 연구소 설립 문제와 조직에 관한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다. 바텔 조사단은 1개월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연구소 설립의 타당성 조사를 진행했다.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이 한국 측 실무대표자로서 한국이 원하는 기술연구소 성격을 미국 조사단에 알리고, 이를 그들의 조사보고서에 최대한 반영토록 노력했다.
한·미 두 나라 실무진은 과학자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연구소 환경을 위해 이사회에 정부 측 인사를 최소화하고 연구소장은 이사회에서 선임하며 연구 과제 선정과 수행, 인사와 예산 집행 등 운영에서 최대한 자율성을 갖도록 했다. 이런 방향에 대한 반대가 있었으나 미국 측의 강력한 요구와 한국 측 준비위원회의 일치된 주장에 따라 정부도 받아들였다. 소장의 독주를 막는 제동 장치도 마련했다. 이사회가 소장을 감독하고 엄격한 평가를 하도록 했다.
1970년 1월, 초창기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연구원들. 앞줄 가운데가 초대 소장 최형섭 박사
바텔 조사단은 연구소 운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구용역 계약제를 도입하도록 제안했다. 한국 측은 기업이 원하는 기술 개발을 연구소가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기업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연구소에 기술 개발을 의뢰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주저했다. 그러나 국내 국·공립연구소가 이 제도에 자극받아 안일한 연구 타성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계약
연구제도’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 연구자의 책임 있는 연구 수행이라는 새로운 연구개발 체제가 한국에 도입되었다. 정부는 기업이 연구를 위탁할 경우 위탁연구비 전액을 면세 조치해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었다.
바텔 조사단은 미 정부로부터 받은 지침을 전했다.
“500만 달러 원조, 200명 안팎의 인력을 둔 연구소입니다.”
한국 측은 그렇게 작은 규모라는 데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상근 국장이 말했다.
“한국 입장은 연구소 규모는 1000명 이상, 건설비는 2000만 달러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업은 한미 정상간 공동성명에서 합의된 내용이며, 한국이 월남전 참전에 따른 미국의 성의로 시작된 일이 아닙니까?”
한국 측의 의견이 미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한국 측 의견을 받아들여 1000명 규모, 미국 측이 건설비 900만 달러를 대고 나머지는 한국 정부가 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바텔 조사단은 국내의 제조업체와 대학, 연구기관, 교육기관, 협회 등을 방문해 한국 과학기술연구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해 12월 15일 한·미 두 나라 정부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및 조직에 관한 80여 쪽의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이현덕, 「미 바텔조사단,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조사보고서 제출」, 전자신문, 2021-09-08 지면 : 2021-09-09 13면).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주변(출처: 전자신문)
초대 과학기술연구원장 최형섭
미국 방문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기관 책임자들을 불러 모아 리셉션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정부의 성과를 이렇게 자랑했다.
“작년에 스웨터를 2000만 달러어치나 수출했습니다.”
이에 원자력연구소장 최형섭 박사가 말했다.
“언제까지나 그런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10억 달러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났겠습니까? 바로 기술입니다. 우리도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초토화 되었던 데서 막 벗어난 농업국가였다. 인구는 많고 자원과 기술은 없었다. 싼 인건비로 봉제, 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으로 막 산업화를 시작하는 단계였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이 없었다. 이공계를 공부한 사람은 있었지만 대부분 이론이나 기초과학을 공부했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1969년 서울 동대문구 홍릉의 KIST 본관 앞에 선 최형섭 소장(출처: 전자사료관)
최형섭 박사는 민족이 부강해지려면 지하자원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일본 와세다대에서 채광야금학을 공부했다. 그 후 다시 미국 노터데임대,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제련공학을 연구해 철광석을 비롯한 비황화광물의 분리, 선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논문으로 195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하여 원자력 연구소 1급 연구관, 상공부 광무국장을 거쳤다. 원자력연구소는 1959년 이승만 대통령 시기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이었다. 그는 명동의 대한중석 사무실 한 켠에 금속 실험실을 꾸려 퇴근하면 그리로 다시 출근했다. 그의 연구는 금속공학의 계면현상과 부선(浮選)이론, 습식야금 등으로 금속 재료공학, 초내열합금의 개발, 고급 강(鋼)의 제조에 절대 필요한 분야였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였다. 1962년 4월 최형섭은 원자력연구소장에 임명되어 과학기술 개발정책과 연구관리에 기여하고 있었다.
미국 방문에서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이라는 의외의 선물을 받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에게 논문하나가 전달되었다. 최형섭 박사의 논문이었다. 그 논문에는 “후진국의 연구개발은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직접 진두지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문장에 빨간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직접 챙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형섭 박사를 초대 KIST 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두 가지 당부를 했다.
“첫째는 예산을 얻기 위해 경제기획원에 드나들지 마실 것. 둘째는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지 마실 것. 혹시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임명장 받기가 무섭게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사청탁이 밀려들었다. 최형섭 소장은 대통령의 신임을 무기로 이를 다 물리치고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 임원진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다과회에서 참석자들에게 약속했다.
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출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우리가 살길은 기술 개발밖에 없습니다. 연구소 설립 과정은 내가 직접 챙길 생각입니다.”
다과회 후 설립 실무 책임을 맡은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을 따로 불렀다.
“전 국장,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연구소 건설 과정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청와대로 즉시 연락하세요. 연구소 설립은 내가 추진하겠소.”
전상근 국장은 회고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나서면서 그 순간만큼 공무원으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설립 과정의 난관
1966년 2월 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출범했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면서 뒤를 받쳐 주었지만 실무 관료들과 해야 하는 설립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출범은 했지만 당장 일할 사무실조차 없었다. 최형섭 박사는 그 시기를 회고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소장으로 임명만 받았지 돈도, 직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기획원에서도 언제 돈을 주겠다는 확답을 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경제기획원에서 직원 한 명과 비서업무를 담당할 직원 한 명, 나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이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무실이 없어 간병하고 있는 병실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이후 한일은행 청계천 6가 지점장이 본 지점을 사무실로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후 다시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로 옮겼다.”
최형섭 소장은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와 고려대 사이에 있는 홍릉을 연구소 건설 부지로 사용하고 싶었다. 농림부장관이 반대했다. 한때 명성황후 능이 있었던 홍릉은 1922년 일제가 임업시험장을 설치하여 2000여 종의 식물 유전자원을 보전, 시험하는 수목원이 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서 지시했다.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38만 평 모두를 주라.”
결국 홍릉 임업시험장 부지 15만 평으로 확정되었다. 건설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곳곳에 암초가 있었다. 최형섭은 사직서를 써서 품에 넣고 다니며 언제든지 낼 준비를 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최형섭 소장을 청와대로 불러 말했다.
“힘드시지요?”
무슨 뜻에서 그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이 매달 홍릉 과학기술연구소와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께서는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과학기술연구소 건설 공사를 시작한 이듬해 정부에 예산 신청을 했다. 며칠 후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이 전화를 했다.
“KIST에서 내년 예산을 10억 원을 신청했다는데, 부득이 2억을 삭감하여 다른 데로 돌려야 하니 양해해 주십시오.”
최형섭 소장은 난감했으나, 막강한 예산 부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당시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하면 국회로 넘기기 전에 대통령에게 예산편성 내용을 보고했다. 김학렬 차관이 청와대에서 새해 예산 규모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가 끝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 차관에게 물었다.
“김 차관, 조금 전 과학기술연구소 예산이 얼마라고 했소?”
“8억 원입니다.”
“원래 신청액은 얼마였소?”
“10억 원이었지만 최 소장과 의논해 8억 원으로 삭감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했다.
“애초대로 10억 원으로 해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삭감된 예산이 전액 되살아났다. 이후 연구소에서 신청하는 예산은 경제기획원에서 단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원안대로 편성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게 과학기술연구소를 직접 챙기며 최대한 지원했다. 그리고 최형섭 소장을 통해 독일의 김재관 박사를 직접 불러들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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