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호 역사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5) KIST와 중화학공업 건설(1)

2025.05.03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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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5)

KIST와 중화학공업 건설(1)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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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제1고로 전경




KIST의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

초대 연구소장을 맡은 최형섭 박사는 부지확보와 연구 및 실험시설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연구원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최형섭 박사는 KIST의 모델로 삼은 미국의 바텔연구소 측과 상의했다.


한국인 과학자들이 바텔연구소에 많이 있었다. 또한 바텔연구소는 미국 전역에 있는 800여 명의 한국 출신 연구원 명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최형섭 박사는 바텔연구소 인사처를 통하여 연구자 명단과 이력서를 확보했다. 1차 목표는 재미 한인 과학자의 1/10인 80명으로 잡았다. 최형섭 박사는 돈이 없어 허름한 숙소에 머물며 주말도 없이 미국 전역을 돌며 한 사람씩 만나러 다녔다. 만나는 연구자들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설득했다.


1) 연구의 자율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한다.

2) 재정적으로 충분히 안정성을 보장한다.

3) 급여와 주택을 확실하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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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기술의 기틀을 세운

KIST 초대 연구소장 최형섭 박

사(1920.11.2 ~ 2004.5.29)

(출처: KIST)



1차로 30명을 선발했다. 그 후 2차, 3차 인터뷰를 하여 최종 18명을 선발했다. 1차 18명은 심문택, 한상준, 정만영, 천병두, 양재현, 최종완, 윤용구, 최상, 조종수, 정원, 김재관, 김종빈, 오동영, 김은영, 정종낙, 윤한식, 이찬주, 이종옥 박사이다. 분야별로는 화학공학을 비롯해 금속공학, 화학, 기계공학, 식품공학, 조선공업, 경제, 전기공학 등을 전공한 학자들이었다.


이중 유럽지역 학자는 유일하게 김재관 박사가 포함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재관 박사는 독일 유학 11년 만인 1967년 9월 귀국하여 KIST 제1연구부장 겸 특수기계연구실장으로 오게 되었다.


초대 연구소 전산실장으로 임명된 성기수 박사는 34세, 집안이 가난해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1961년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2년 1개월 만에 석·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하버드대 300년 역사에서 최단 기록이라고 한다. 그의 첫 월급이 10만원이었다. 성기수 박사는 회고했다.


“귀국 후 당시 나는 공군 대위로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교관이었어요. 당시 월급이 2만원이었어요.생활이 어려워 서울대 공대·상대와 행정대학원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한국경제개발협회 등 모두 다섯 곳에서 일을 했어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산실장에 임명되고 나니 월급이 다섯 곳에서 받은 돈보다 더 많았습니다. 당장 다른 일을 그만뒀어요. 당시 연구소는 최고 선망의 직장이었어요.”


귀국 과학자들의 월급은 당시 서울대 교수의 3배로, 대통령 월급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전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1/3 수준이었다. 국내 국립대 교수들이 자신들보다 귀국한 과학자들의 연봉이 월등히 높은 것을 알고 여러 경로로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이 그들의 급여 명세서를 본 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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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해외 유치 과학자들(출처: 김재관 박사 기념관)



“이대로 시행하시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 교수들이 제기한 ‘형평성 논란’은 잠잠해졌다. 연구자로서 경력이나 연구소 경영의 책임의 무게로 보나 연구원보다 월등했던 최형섭 박사는 자신의 봉급을 연구원 최고 호봉에서 1000원만 더 많은 금액으로 책정했다. 그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이 넘었다.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통령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 나라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이렇게 역 유출된 역사가 없었다. 험프리 부통령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KIST의 재미 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 유출 프로젝트다!”



KIST와 포항제철

일본측 철강 전문가들은 철강산업의 전 분야를 아는 KIST의 김재관 박사로 인해 곤혹스러워 했다. 일본에 대한 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는 까닭에 제철소 설비는 일본측의 추천, 사전검토와 승인이 있어야 했다. 일본은 한국이 철강산업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효율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제철소 시설을 권유했다. 김재관 박사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제철소를 건설해야 한다!”


김재관 박사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강방식도 그렇다. 용광로에서 나온 선철을 잘 늘어나면서도 강인한 강(鋼)으로 만든 제강방식에는 평로(平爐, Open Hearth Furnace)방식과 전로(轉爐, Converter)방식의 2가지가 있다. 이전 전로방식은 품질과 효율성이 떨어져 평로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1946년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 공장과 도나비츠(Donawitz) 공장에서 99.5%의 고순도 산소를 고압·고속으로 전로 안에 분사하여 철의 불순물을 태워 정련하는 LD전로방식을 고안하여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김재관 박사가 있었던 독일 데마그제철소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 방식은 짧은 시간, 저렴한 비용, 높은 생산성으로 향후 철강생산의 대세가 될 신기술이었다.


KIST의 김재관 박사는 아직 상용화되지 않아 일본 기술자들도 모르는 세계 최신의 LD전로 방식을 요구했다. 또한 중공업 발전에 필수적인 특수강과 후판 제조가 가능한 연속소둔주조 설비도 필수적으로 갖추고자 했다. 일본은 제조하기가 어려우나 부가가치가 높으며, 중공업 발전에 필수적인 특수강 제조능력을 포항제철이 갖추는 것에 반대했다. 한국이 특수강까지 생산하게 되면 일본의 특수강 시장이 큰 위협을 받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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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기공식의 (왼쪽부터)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특수강을 생산하지 못하면 산업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식견을 가진 김재관 박사가 주장을 관철시켰다. 김재관 박사가 그때 일본과의 협상 자리에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제철 왕국, 자동차 왕국, 조선 왕국, 방위산업 왕국이 될 수 없었거나 훨씬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늦어졌을 것이다.


KIST 김재관 박사의 비전에 따라 1970년 4월 1일 조강 베이스 103만톤의 포항제철소가 착공되었다. 용광로 1호기, 압연공장, 후판공장 등 주요 시설 배치는 김재관 박사가 직접 포항 현장에 가서 도면을 펼쳐놓고 허허벌판에 말뚝을 박아 지정했다. 김재관 박사는 향후 500만톤 이상으로 제철소 시설을 확장할 것을 내다보고 공장을 배치했다.


이후 20년 동안 포항제철은 생산능력이 연 940만 톤으로 9배나 커졌다. 새로운 용로 제철공장이나 제강공장 및 압연공장을 수없이 추가 건설해야 했다. 김재관 박사의 앞을 내다본 공장과 시설 배치로 인해 먼저 세운 공장의 조업을 중단함이 없이 증설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포항제철 건설

개발도상국의 대규모 프로젝트에는 정치권이 개입하여 일정 비율의 정치자금을 요구하거나, 이권을 챙기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포항제철 건설과 설비 구매 때도 정치권에서 특정 업체를 거론하면서 일정 비율의 뇌물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하라는 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관행에 따른다면 포항제철은 부실 공사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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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건설 현장 사무소를 방문하고 나서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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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제1기 설비 준공식(1973.7.3) (출처: 포스코)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서 건설과정에서 정치권의 정치자금 압박이나 설비 공급사 선정 압력을 물리칠 수 있게 재량권을 줄 것을 건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의 건의문에 친필로 서명해 주었다. 그것이 ‘종이 마패’로 불리며 정치권의 입김과 압력을 배제하고, 포항제철에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좋은 조건에 도입하여 높은 생산성과 경제성을 갖춘 기업이 될 수 있게 했다.


포항제철 건설을 진두지휘한 박태준 사장의 우향우 정신은 유명하다.


“일본에서 받는 대일청구권 자금은 민족의 피 값이다. 민족의 피 값으로 짓는 포항제철 건설사업이 실패하면 국가와 국민에게 대역죄를 짓는 일이므로 모두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


박태준 사장은 임직원들과 공사업체 관계자들에게 죽을 각오로 건설사업에 임하도록 독려했다. 엔지니어들은 현장에 나가 직접 건설공사를 감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시로 불시에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방문하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부도 철강 공업 육성법을 제정하여 지원했다. 그리하여 포항제철소는 관민의 단합된 노력으로 세계에 유례가 없이 짧은 착공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9일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을 배출하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6월 9일이 철의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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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김재관 박사의 구상과 집념으로 연산 103만 톤의 포항종합제철 제1고로 쇳물(출처: 김재관 박사 기념관 사진)
아래) 포항종합제철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터져나오자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사장과 임직원(1973. 6. 9 오전 7시 30분) (출처: 포스코)



안보 위기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과 함께 민간 업체들도 베트남에 진출했다. 군인이나 노동자들이 받은 봉급 소득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대한 수출도 급증했다. 1964년 베트남 파병과 함께 진출한 한국기업이 벌어들인 사업수익은 총 7억 4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으로 한·미·일 세 나라의 협조체제가 굳건해지자 외국 자본가들이 한국에 안심하고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외국 자본 도입이 1965년에는 4000만 달러도 안되었으나, 4년 뒤 1969년에는 12배가 넘는 5억 달러로 대폭 증가되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한국의 경제가 눈에 띄게 발전하자 북한이 초조해졌다. 그때까지 공업화나 국민소득 수준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시켜 통일하겠다는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제124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하여 경찰 및 군과 총격전 끝에 격퇴되었다.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수다”라고 하여 국민을 놀라게 했다. 사건 후 특수게릴라 부대의 후방침투와 내부 교란에 대비하여 두 달 열흘만인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군사훈련(교련)이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30일에 다시 북한 무장공비 120명이 3개 조로 나뉘어 동해안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했다. 남한 후방에 거점을 확보하고 혼란을 조성할 목적이었다. 군경과 함께 갓 창설한 향토예비군이 투입되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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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주둔 한국군 청룡부대 장병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이처럼 북한의 안보 위협이 극적으로 고조되던 시기에 미국의 리차드 닉슨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 방어를 책임져야 한다”고 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세계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결하는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이 중국과 소련을 분리시켜 공산진영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출혈을 강요하는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전략적 변화였다.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 안보의 한국화”를 내세우며 한국 주둔 미 제7사단과 제2사단 모두를 철수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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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박정희 정부는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위반이라며 반발했다.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0년 7월 5일 미국은 주한 미 제7사단을 철수한다고 일방적 통보를 했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히 항의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 전에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과 장비 현대화 선행을 요구했다.


닉슨 행정부는 동맹국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주한미군의 감축과 함께 한국 국방력의 증대를 병행하여 추진했다. 여기에는 한국군 역량이 증대하는 데 따라 제2사단도 추가 철수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은 15억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 군사차관을 제공하여 한국군의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했다. 양국 외무 국방 고위 관리가 연례 한미 안보협의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한국이 무기와 탄약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까지 한국은 소총은 물론 철모나 수류탄도 생산하지 못하도록 방위산업에 제약당하고 있었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KIST와 방위산업,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기반 구축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1969년 9월경 당시 김정렴 상공부장관이 ‘한국 기계공업 육성방안’ 연구를 미국 바텔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공동으로 위탁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계공업 기술력은 겨우 농기계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KIST 측은 주로 우리나라 기계공업 현황과 실태조사 임무를 수행했고, 미국 바텔연구소 측은 발전방안을 제시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요약되었다.


“①조선소 ②중기계종합공장 ③주물선(鑄物銑)공장 ④특수강공장, 이 4대 주도산업(lead industry)분야를 선정하여 집중육성하여 나머지 산업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


당시 조선산업이나 종합기계공업보다는 스위스의 정밀기계산업을 모델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연구팀은 우리나라처럼 기술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조선공업이나 종합기계공업처럼 덩치가 큰 산업이 노동력 확보와 수출에 모두 유리하고, 여러 가지 파생산업을 발전시키기 쉽다고 했다. 그러나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오원철 차관보는 이 연구결과에 부정적이었다. 방위산업에 직접적인 연계성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연구보고서는 없던 것으로 되어버렸다.


약 3개월 후인 1970년 7월경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 부총리가 한국 측 연구책임자였던 KIST 이경서 박사에게 상공부에 보고했던 연구보고서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이경서 박사는 이낙선 상공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학렬 부총리에게 보고했다. 김학렬 부총리는 상공부 장관의 동의를 구하고 이를 청와대에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일주일 후인 1970년 7월 청와대 경제과학심의회의를 마친 후 이 내용이 특별보고 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보고서의 결론으로 차트 맨 마지막 장에 “중공업은 곧 방위산업”이라는 문구를 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연구보고서를 승인하고는 경제부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김학렬 부총리는 황병태 경제협력차관보를 팀장으로 하고 경제기획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엘리트들로 특별전담팀(TF)을 꾸렸다. 그러나 가진 것은 의욕뿐, 기술도 기술자도 경험도, 기본 설비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971년 4월 27일 3선 개헌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어 7월 1일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공업의 한계성과 안보 환경의 악화로 인해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앞으로 중화학공업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며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곧 중진국의 상위국에 올려놓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제계는 물론 경제기획원조차도 중화학공업의 육성에 회의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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