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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이은과 마사코의
정략적 국제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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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8일 결혼식 때의 영친왕과 마사코(이방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마사코(方子)와 결혼한다는 발표는 일본에서는 1916년 8월 3일에 있었다. 15살의 마사코(方子)는 방학 중 오오이시(大磯)의 집안 별장에서 신문을 들추다가 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계획에 일본 최초의 총리이며 정계 실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집안에서는 본인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결정했었다. 도쿄의 집으로 돌아 온 마사코는 아버지로부터 약혼 결정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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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 여사의 친정 가족-왼쪽부터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노리코, 이방자      이토 히로부미와 어린시절의 영친왕     . 



마사코 집안은 일본 황실의 직계 자손을 제외한 11개 방계 황족 가문의 하나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가문이다. 이런 방계 황족은 천왕의 직계자손이 끊길 경우 후계를 잇거나, 장차 천왕이 될 황태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었다. 마사코는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왕의 첫딸로서 1925년 쇼와(昭和) 천왕이 되는 히로히토친왕(裕仁親王)의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妃) 후보자3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은 후사가 없어서 쿠니궁(久邇宮) 아사히코(朝彦)의 4남인 마사코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가 입양되어 후계를 이었다.

그런 만큼 나시모토노미야 왕가는 집안과 정치적 영향력 등에서 다른 왕가에 밀렸다. 히로히토의 황태자비 자리는 혈통상 그녀의 사촌인 쿠니궁의
나가코(良子, 1903~2000) 왕녀에게 돌아가, 그녀가 코준황후(香淳皇后)가 되었다. 마사코는 대신 한국병합 후 ‘내선일체’를 선전하기 위한 정략적 목적으로 한국의 왕세제 영친왕 이은의 비가되게 되었다.

일본 귀족 자제들의 학교인 학습원 중등과에 다니고 있었던 마사코는 2학기 개학을 하자 한국 여학생처럼 앞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양옆으로 땋고 학교에 갔다. 집에서는 한국어 회화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 왕실의 왕세제비가 되는 결정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결심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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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망명 시절의 민갑완(민병휘 소장 사진)
 


2년 3개월이 지난 1918년 11월에 교섭이 마무리 되어 결혼식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마사코는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여러 집안사람들과 함께 처음으로 도쿄 도리사카(鳥居坂)에 있는 영친왕 저택을 방문하여 첫 대면을 했다. 이날 마사코는 영친왕으로부터 약혼반지를 받았다. 다이아몬드를 중심에 하나, 그 둘레에 다섯 개를 박아 조선황실의 배꽃모양 상징문양을 만든 반지였다. 마사코는 신부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다니고 있던 학습원을 중퇴했다. 11월 30일 학습원 친구들이 마사코를 위해 교실에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1918년 12월 5일 일본 다이쇼(大正) 천왕이 두 사람의 결혼 칙허를 내렸다. 약혼예물을 전달하는 납채날은 12월 8일로 정해졌다. 마사코의 집으로 서울의 광무황제로부터 축전과 함께 양복지 다섯 필, 도미 한 상자, 청주잔 한 세트가 도착했다. 조선 황실에서 보낸 납채였다.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정해졌다.

한·일 황실 간 국제정략결혼을 하게 된 영친왕 이은(李垠)은 순종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는 전 광무(고종) 황제의 일곱째 아들로서 귀비 엄씨(貴妃嚴氏)에게서 태어났다. 이은은 1900년 8월 영왕(英王)에 봉하여졌으며,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되고 순종이 황제 위에 오를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해 12월 5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은 대한제국 황실을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 10살의 영친왕 이은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데려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순종황제가 폐위되어 황제보다 한 단계 낮은 이왕(李王)이 되었다. 이에 따라 황태자였던 영친왕도 왕세제(王世弟)로 격하되었다.

국가 간의 정략적 결정에 의해 복잡하게 국제결혼을 해왔던 유럽 왕실들과는 달리 조선 500년 동안 왕실이 외국 사람과 국제결혼을 한 예가 없었다. 또한 영친왕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명성황후 민씨 집안의, 고종의 척족으로서 성균관 대사성, 동래부윤,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고 미국·영국·벨기에 등의 특명전권공사를 지내면서 조선조 말기의 외교사절로서도 크게 활동한 민영돈(閔泳敦)의 딸 민갑완(閔甲完)이 약혼녀였다.

민갑완은 영친왕과 공교롭게도 생년월일이 같은 1897년 10월 20일 생이었다. 그날은 명성황후가 참살된 지 2주기가 되는 기일(忌日)이었다. 민갑완은 1907년 만 10세에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그해 광무황제 고종이 황제위에서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즉위했으며, 12월 5일에는 약혼한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볼모로 잡혀가는 바람에 혼례식을 거행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황실에서는 12월 20일 사람을 보내어 연초록 비단보에 빨강실로 묶은 황금 쌍가락지를 예물로 보내며 “시국이 시끄러우므로 예식을 따라 정식으로 행할 수는 없으나 길일을 택해서 예물을 전달하고자 하니 이해하고 받아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해왔다. 민갑완은 예물을 받고 ‘이것으로 나도 영원히 이왕가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민영돈은 “딸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것이 가문의 영광이고 기쁨이지만, 국모가 되는 딸의 장래를 행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더구나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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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가족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1911년 영친왕의 생모 귀비 엄씨가 장티푸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4년간 영친왕은 한 번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었다. 그 기간 동안 민갑완의 집으로 궁중에서 철마다 의상을 보내주었고, 궁중요리 등 진귀한 음식을 끊임없이 보내왔으나 약혼자인 영친왕과는 연락이 전혀 없었다. 왕세제와 약혼한 사이로서 민갑완은 가족과 친지 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했고, 문밖에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다시 7년의 세월이 갔다. 1918년 영친왕이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다는 신문기사가 났다. 그해 12월 1일 영친왕이 귀국했다. 궁에서 열린 식사 자리에
민영돈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광무황제는 영친왕에게 “간택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영친왕은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광무황제는 “서둘러서 가례(嘉禮: 결혼식)를 올려야 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인 측근들이 말을 가로막았다.

12월 16일 영친왕은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틀 후 창덕궁에서 상궁 세 사람이 민갑완의 집으로 와서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파혼을 알렸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순종)의 뜻과 총독부의 지령입니다. 약혼반지를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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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친왕, 이구, 이방자 여사

 


“간택을 하고 1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 파혼이라니…” 아버지 민영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 간택이 되면 국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장녀인 민갑완이 결혼하지 않으면 밑에 동생들도 결혼할 수 없었다. 아버지 민영돈으로서는 집안을 망치게 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씨 집안에서 파혼을 승낙하기까지 5~6일이나 걸렸다. 그동안 상궁들은 매일같이 민갑완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는 동안 민씨 집안에서 파악한 바는 “이번 일은 폐하의 명령도 아니고, 총독부의 지시도 아니다. 오로지 친일파의 간사한 계략이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상궁들의 입에서 “영친왕이 일본의 공주와 결혼한다. 그러니 따님은 다른 집안을 골라서 시집을 보내라”는 말이 나왔다. 온 집안에 통곡 소리가 가득했다. 연일 약혼반지 반환을 요구하는 상궁들에게 민갑완은 “간택되어 약혼반지를 주었으나, 일본의 강압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반지를 강탈해간다”는 영수증을 요구했다. 상궁들은 당황했다. 1919년 1월 3일 마침내 영수증을 받고 민갑완은 약혼반지를 돌려주었다. 아버지 민영돈은 상궁들을 꾸짖고는 쓰러졌다. 이런 난리통에 상궁들이 영수증을 훔쳐갔다. 민갑완은 영수증을 되찾을 생각을 포기했다. 그녀는 “나의 운명은 끝났다”라고 기록했다.

1919년 1월 19일 일요일, 결혼식을 위해 구황실 대표단이 환송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오전 8시 40분 부산행 기차를 타고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구황실 대표단에는 순종의 어사(御使)로서 이왕직 장관 민병석(閔丙奭)과 왕비전하의 어사로서 윤덕영(尹德榮,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부친 윤택영(尹澤榮)의 형으로 황후의 삼촌이며 대표적인 친일인사), 덕수궁 광무황제의 어사로서 조민희(趙民熙)와 함께 일본인 이왕실의 일본인 관리인 다나카(田中) 서무과장 등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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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코(이방자) 여사

 

이틀 뒤인 1월 21일 서울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가 긴급 호외를 발행했다. “전 황제 이태왕(李太王) 즉 이왕(李王: 순종)의 아버지가 오늘 아침
에 뇌일혈을 일으켰고 그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

다음날인 1월 22일 조선총독부는 “광무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오전 1시 35분에 뇌일혈을 일으키시어 오전 6시 35분에 중태에 빠지셨으며, 1월 22일 오전 6시에 서거하셨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로서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대한제국 황실을 관리하는 이왕직 궁내관으로 근무하며 누구보다 광무황제 가까이에 있었던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자신의 회고록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 1926, 서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그날(1월 21일) 밤 2시경으로 생각되는데, 우리 가족이 모두 단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태왕 전하께서 중태에 빠지셨으니 즉각 오십시오.”


(중략) 근친과 귀족들이 급보를 듣고 달려와서 별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중략) 10분 뒤에 왕전하(순종)께서 두세 명의 친시무관만을 거느리시고 도착하시어 즉시 별실로 들어가셨다. 그러나 생전의 따스하고 자애로우신 얼굴 그대로 아바마마이신 태왕 전하께서는 이미 유명을 달리하시었다.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8, pp.252~3

서거 발표에는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 문제가 걸려 있었다. 일본은 두 신혼부부를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파리로 신혼여행을
보내 국제사회에 한국민이 일본의 통치에 행복해 하고 있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할 계획이었다. 전황제의 서거 사실을 숨기고 결혼식을 진행하느냐, 결혼식을 연기하느냐를 두고 서울과 도쿄 사이에 바쁘게 협의가 오갔다. 결론은 나흘 뒤 결혼식까지 비밀유지가 어렵다는 것으로 났다. 결혼식은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로 연기되었다. 광무황제의 죽음은 이리하여 실제보다 하루 늦은 1월 22일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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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 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