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호 인물 한국화단의 거장 남관

2025.06.06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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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단의 거장 남관


글 김정인 로아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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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

1911. 11. 25~1990. 3. 30

경상북도 청송


수상

1990 제35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1 은관문화훈장

1974 제6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부문

1966 망통 국제비엔날레 대상


경력

1977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운영위원회 위원

1968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 심사위원회 위원장




“자네 소식 들었어?”

“남관이 대상을 받았다네.”

“어디서?”

“프랑스 망통 비엔날레에서.”


그랬다. 1960년대 그 시절, 대한민국 국민에게 너무도 감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1966년 이제 막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켜야 했기에, 경제 외엔 정신도 팔 수 없었던 때가 아닌가.


해방 전 일본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이후 프랑스로 떠났던 남관 선생은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미술작가다. 컬렉터 16년, 갤러리 4년 차인 나에게 “한국 최고 작가를 꼽아보라”고 묻는다면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남관 작가라고 대답한다.


한국화단의 거장 남관(1911~1990)은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삼 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생전에 그는 “예술가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심성이 따뜻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 어머니의 가르침과 보살핌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그림을 그리다 잠시 쉴 때 눈을 감으면 고향의 자연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며 청송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생각했다.


남관은 보통학교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1925년 14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 중학교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간 지 스무 해가 되어갈 무렵 <노인상>이라는 작품으로 ‘후나오카상’을 받아 마이니치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 도쿄 대폭격으로 인해 화실이 불에 타면서 남관 작품들도 모두 불길에 사라졌다. 하숙방에 두었던 <호박> 작품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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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 1966 망통 대상작

<남관화집(198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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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비치는 일그러진 상들>, Oil on canvas, 211×452㎝, 1981




광복과 함께 남관도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활동을 이어갔다. 1947년 이쾌대·이인성·이규상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했고, 1949년에는 제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추천작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남관도 종군 작가로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통에 그의 작품들이 다시 비극을 맞았다. 또 화실 화재로 작품 모두 사라졌다.


1954년 12월, 남관은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의 미술아카데미 ‘들라 그랑드 쇼미에르’에 입학해 추상미술에 몰두했다. 가난한 한국인으로 학비가 모자랐기에 그림 공부를 놓지 않으려면 먹을 것을 아껴야 했다. 머리카락이 뭉텅 빠질 정도의 영양 결핍에 시달렸지만 그의 시선은 항상 그림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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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노인들>, 160×13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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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뜰 인상>, Oil on canvas, 130×162㎝, 1984




1958년 남관은 당대 저명한 대가들을 초대하는 ‘살롱 드 메’에 피카소·브라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살롱 드 메’가 이후 5차례에 걸쳐 남관을 필요로 했듯이 세계적 유명 화랑인 독일 함부르크의 멘슈,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티나, 프랑스 파리의 베르카메르, 벨기에 브뤼셀의 랑그르에귀 같은 화랑들도 그의 작품을 앞다퉈 전시했다.


남관이 세계적인 최고 작가로 알려진 계기는 1966년 망통 국제비엔날레에서 파브로 피카소, 베르나르 뷔페, 안토니 타피에스 등 세계적 거장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수상함으로서 확고한 작가적 위치를 다졌다.


“남관은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위대한 예술가이다.(세계적인 미술평론가 가스통 디일)”

“나의 작품에 담기는 나의 정신의 연선(聯線)은 동양이다. 나는 서구인이 아닐 뿐더러 될 수도 없다.(남관)”


망통에서의 대상 수상 소식을 접한 국내는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같은 해 서울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남관 작품 60점(유채 35점, 과슈 25점)을 공수해와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들어온 작품들은 <동양의 흔적> <동양의 환상> <동양의 리듬> <동양의 고독> <고고학적인 구도> 등 동양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상념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또 <축일(祝日)> <겨울 강변> <흰 문(門)> <곰팡이 꽃> 등 현실적 자연미의 감흥이 추상주의 형식으로 표현된 작품들도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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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Oil on canvas, 100×80㎝, 1975 <계간미술(1976) 겨울호(창간호)> 수록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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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로 가족>, Oil on canvas, 129×159㎝, 1985


 

1968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국전 서양화 심사위원장,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너무도 유명한 작가였기에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


1985년 어느 날, 정광훈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저는 테이트갤러리의 대리점 웨르너사(社) 사람인데, 9월 20일부터 보름 동안 남 화백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테이트갤러리라 하면 런던 시내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 박물관이었기에 초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관은 그림 30점을 넘겨주었다. 날짜가 지나도록 전시회는 열리지 않았고 정 씨는 번번이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기 바빴다. 답답한 마음에 갤러리에 직접 문의했더니 그런 전시회는 계획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기였다.


사기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지 못한 상태에서 1987년 11월, 서울예화랑에서 전시 중이던 작품 12점을 도난당했지만 계속되는 악재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여든 살에 접어들어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1990년 3월 제1회 도쿄 아트 엑스포에 작품을 출품했다. 여러 나쁜 사건들은 남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그해 3월 말, 다사다난했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나는 두 번의 전쟁,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체험했다.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보았고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몸은 나에게 대낮의 태양 아래 비로소 노출된 고대 사원 벽에 펼쳐진 유물 같이 보였다.”


작가는 비극적인 삶의 체험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승화시켜 고대 상형문자로 표현했다. 민족과 예술, 인간의 욕망과 갈등, 전쟁과 죽음, 죽은 이의 떨어져 나간 팔다리 이 모든 것이 작가에게 아픔이며, 작품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숙제였다. 


여기까지 남관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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