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 인물 박서보 화백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2025.07.14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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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화백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글 김정인 로아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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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질 No 6-69> Oil on canvas, 80×80㎝ 1969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서보 화백은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하며 성장했다.


그는 1950년 홍익대학교 문과대학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하였고, 이후 서양화로 전공을 변경하여 1952년에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 이 시기에 만난 김환기 교수와 이종우 교수의 영향으로 그의 예술 세계가 넓어졌다.


박서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감을 바탕으로 1956년 반국전을 선언하고,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과 함께 동방문화회관에서 독립전을 열었다.


1956년에는 이봉상 회화연구소를 운영하며 현대미술가협회와의 교류를 시작했고,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만나 1958년 결혼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며 가족과 함께한 그의 삶은 예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57년에는 김창열, 하인두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에 합류하고 ‘현대전’ 그룹전에 2회부터 6회까지 5회 연속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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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화백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학교 내 학생 운동과 시위로 인해 개인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그의 안성 작업실은 여러 차례 도둑질과 화재로 초기 작품들 많이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서보 화백은 작업을 계속 이어갔고, 2015년 ‘단색화 열풍’으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2019년에는 89세에 생애 두 번째 회고전을 열며 여전히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지재단을 설립하였고 2023년 3월에는 박서보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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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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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0월 세계청년화가파리대회 각국 대표들과 함께 방·고호 형제 무덤을 다녀오는

길에서(맨 우측이 박서보)




2023년 10월 14일, 92세로 타계하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은 “내가해야 할 것이 있으니 작업실에 캔버스를 배접해 놔라”였다. 이는 그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박서보 화백의 삶과 예술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기억될 것이다.


작품세계

1960년 젊은 열정으로 가득 찬 청년 박서보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가 세계 청년 화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비가 필요했다. 아시아 재단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이곳은 젊은 작가를 지원하는 곳이 아니라 대가들을 지원하는 곳 입니다.”


이 말에 화가의 가슴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선생님, 보십시오. 선생님들이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훗날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까요? 바로 제가 훗날 이 나라의 대가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패기가 넘쳤다.


결국 그는 여행 경비의 일부를 지원받고 살고 있던 집의 월세 보증금을 털어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펼치며 1등상과 3등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었다. 최고라고만 생각한 문화 선진국이 “화려한 포장지로 싼 볼품없는 상자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예술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민과 고통 속에서 탄생한 것이 ‘원형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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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질 No.64-1> Oil on canvas,160×128.3㎝ 1964(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원형질(1962~1964)

원형질은 인간의 내면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연작은 주로 물질과 형태의 변형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생존에 대한 고뇌를 표현한다.


박서보는 전쟁의 상흔과 젊은 세대의 절규를 통해 허무와 항변, 생존에 대한 몸부림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원형질은 물질의 질감과 형태를 강조하며 관람객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작품은 그의 실존주의적 관점과 깊은 연결이 있으며,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고통을 전달한다.


결국 원형질 연작은 박서보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형성하는 출발점이었다. 이 시기까지 재료와 소재 등 서양 미술에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 주장한 모든 것이 서양의 논리와 이론에 노예였다는 것을 깨달은 박서보는 이때부터 불경, 노자, 장자를 읽으며 동양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림은 수신의 도구였구나”를 깨닫게 되면서 나의 모든 것을 비우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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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질1-62> Oil on canvas, 163×131㎝ 1962(출처: 국립현대미술관소장)



묘법(1967~1986)

“체념과 포기의 미학 그리고 비움”


둘째 아들이 한글을 배우는 과정에 칸에 한글을 채우지 못하고 체념하고 지우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찾고 있던 체념과 포기 그리고 비움의 미학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저것이 체념이구나.”)


“집중을 통해 쓸데없는 번뇌며,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예술에는 정신이 있고 또 하나는 기술, 그러나 기술이 정신을 앞서갈 수는 없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70년대에 시작된 미술 운동인데,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시대였고, 정치적으로는 아주 암울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굉장히 폐쇄적인 시대였다.


아무 정보도 없는 캄캄한 시대에, 대단히 독자적으로 한국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 중심, 그 리드는 박서보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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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갤러리 개인전>



후기 묘법(1982~2023) 지그재그

1983년 일본 교토 국제 종이 의회에 참석한 박서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세계 미술이 한 단계 성장하려면 그동안 바탕에 불과했던 캔버스와 종이가 앞으로 나와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한지 스스로가 작품이 되는 것, 이것이 후기 지그재그 묘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서보는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나는 완벽하게 나의 작업을 마무리하지 않고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 나머지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완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 스스로 시간의 흐름에 한지의 색들이 변하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밀리어진 부위에서 표정이 생겼다. 지금도 더 깊은 색으로 익어가고 있다. 한지가 마르면 물을 뿌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쉴 수가 없이 하루 24시간을 작품을 해야 했다. 건강의 문제로 오랫동안 작업을 하지 못해 지그재그 작업에는 아쉽고 미안한 감정을 작가는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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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 NO-211-83> KOREAN PAPER, 66.7×97.9㎝ 1984(도록 수록)



1994년 지그재그에서 선 긋기로 이행

박서보 작가는 이전의 지그재그 방식에서 참선의 선긋기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지그재그 묘법의 아이디어와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더 절제되고 금욕적인 느낌을 준다.


그의 작품에서는 텍스처가 줄어들고 수직적인 패턴이 강조되며 반복성이 생겨서 더욱 엄격한 인상을 준다. 특히 흑색톤으로 통일된 색조는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전달된다. 이러한 검정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는 깊은 정신성을 나타낸다.


박서보가 선택한 검정색은 단일한 색상이 아니라, 자연에서 오랜시간 동안 쌓여온 깊이 있는 색으로, 그로 인해 검은색이면서도 단순히 검지 않고, 흰색이면서도 희지 않은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정신적이고 자연적인 깊이를 함께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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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riture No. 210125> Pencil and Oil on Acrylic Based Canvas,

75.3×100㎝ 2020(출처: 박서보재단)



색묘법(1998년)

1998년 동경화랑 전시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자연의 아름다움에빠져서 그동안 나의 짧은 생각으로 색채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자연의 색을 작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색은 자기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그 색을 보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


“집중을 통해서 쓸데없는 번뇌며,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박서보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평생 담배를 물고 살았다.쉬는 시간에 정성껏 읽어보겠다.

그러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서야 끊었다.

내 나이 아흔둘, 당장 죽어도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한다.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요즘 많이 걸으며 운동하는 것은 더 오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그리기 위한 것이다.

사는 것은 충분했는데,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 그 시간만큼을 알뜰하게 살아보련다.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하려는 사람들 많을 거다.

하지 마라! 내게는 이제 그 시간이 아깝다!

그래도 말을 남기고 싶으면 문자를 넣어라.

문자가 공허한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어라.

쉬는 시간에 정성껏 읽어보겠다.

내게 전해달라고 며느리에게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물을 모든 것을 며느리에게 묻는다.

손에서 전화기가 떨어지질 않는다. 안쓰럽고 짠하다.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이 들어 마른기침이 많아졌다.

생각한 것에 폐암 판정을 받은 것뿐이다.

종합병원을 학교 다니듯 했고 온갖 검사를 다 받아보았다.

그저 뒤늦게 폐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늘 대비해도 이렇다.

얼마나 많은 의사를 거쳤던가. 의사를 탓할 일도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굳이 범인을 꼽자면 담배일 거다. 내 소식은 앞으로 이렇게 간간이 전하겠다.

다시 한번 부탁하건대 안부 전화하지 마라.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2023년 10월 14일 박서보 작가는 끝까지 선을 긋다 우리와 영영이별을 했다.


여기까지 박서보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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