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호 인물 100년 전의 정신으로 지금을 바라보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2023.04.20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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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정신으로 지금을 바라보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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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을 맞아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출처: 뉴시스)


 


몇 년 전 이맘때가 떠들썩했다.

100주년을 맞은 3·1운동 때문이었다.

어느덧 100살을 훌쩍 넘긴 3·1운동은 참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이다.

이러한 3·1운동에 진심인 사람이 있다.

30년이 넘도록 한국 독립운동과 지역에서 발생한 3·1운동을 연구하고 있는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다.


글 이예진 사진 백은영

사진제공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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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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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33인 모습이 담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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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된 3·1운동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을 모르는 한국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매년 3월 1일을 3·1절로 기념하여 공휴일로 하고 있지만 3·1운동이 얼마나 확산됐으며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하게 설명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때 있었던 3·1운동이 하루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장기화가 되어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과서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단순히 3·1운동을 일으킨 민족대표 33인과 의의 등을 다룰 뿐이다.


이에 대해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3·1운동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크게 일어나 한 눈에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3·1운동은 1910년 8월에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뒤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그는 3·1운동의 특징으로 “영웅이 없는 독립운동, 모두가 영웅인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꼽았다.


이 회장은 “주권을 잃어버린 다음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일제는 무단통치로 압제했고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탄압을 피해 해외로 나가 활동을 했다”며 “마치 국내는 죽어있는 모습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일제의 압제는 심했고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힘겨운 상황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보면 국내외 모든 상황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안창호, 홍범도, 김동삼, 신채호 선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 만주 등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위해 기반을 닦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공들여 쌓은 탑들이 무너졌다.


특히 세계 정세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군 측이었으며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생했다. 연합군 측은 연해주 지방에 일본군의 파견을 요청했고 독립군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연해주는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국내에는 독살설이 퍼졌고 반일 감정은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그러자 3월 1일 종교인들이 나섰다. 손병희, 이필주, 한용운 등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민족대표 33인이 일제 경찰에 잡혀가자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민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갖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운동은 시작됐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굉장히 놀라운 것은 누구의 지시 없이 각성된 개개인들이 주역이 되어 진행했다는 점”이라며 “미리 <독립선언서>를 보내 일어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서울의 고종황제 장례식에 참여했다가 3·1운동을 보고 지방에 내려가면서 퍼졌다. 통계를 보니 전국적으로 5월까지 3개월 동안 지속됐으며 그 뒤에도 간헐적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시킨 사람이 없다. 우리 일,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전제군주제하의 신민, 일제 식민지하의 피지배민족에서 자유민주국가의 국민이 될 수 있다는 자격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라며 “국가 공동체에 대한 개개인의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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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전국적으로 봉기한 3·1운동 덕분에 일제는 강압만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3·1운동의 규모가 확장되면서 당시 여러 나라에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 <AP통신>, 상해의 <민국일보> 등에서 3·1운동에 대해 다뤘고 일제는 국제 여론을 잠재워야만 했다. 이에 물론 기만적인 행위였으나 1920년대 일제는 문화통치를 시행했고 덕분에 국내에서는 언론, 출판 등의 자유로 각종 민족문화운동이 전개됐다.


그리고 3·1운동의 의의 중 가장 큰 하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주권, 국민에 의한 의회와 정부 구성, 남녀평등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에 규정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과 원칙을 계승했다. 우리 헌법 전문에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하략).”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3·1운동은 대한민국 존재의 근간이 됐다.



3·1운동은 오늘날 우리의 롤모델

이처럼 3·1운동은 대한민국의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자 핵심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 이 회장은 “3·1운동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3·1운동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생기고 자유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헌법 제정해서 오늘까지 왔다”면서 “그런데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슴 깊이 새기면 좋겠는데 의식을 못하면서 살고 있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그리고 3·1운동이 워낙 방대한 탓에 많은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부분도 아쉬워 이 회장은 잡지 <월간 순국>에서 각 지방마다 있었던 3·1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7~8년 전부터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각 시위들을 소개하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다. 5년이면 60회인데 2000개가 넘는 시위 중 60개만 소개하기가 아쉬워서 계속 연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3·1운동을 ‘일제의 수직적 지배체제에 대한 수평적 저항’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자율성과 향촌공동체가 발달됐다. 그런데 일제는 무단통치 10년 동안 향촌공동체를 해체하고 일원적이고 일방적이며 수직적인 지배체제로 만들었다”며 “그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수평성이 학교, 교회, 시장이었다. 3·1운동은 다 그곳에서 발생했다”고 근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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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이 2018년 8월 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학술 심포지움’ 개회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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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회장이 2019년 8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3.1운동의 청년지도자 학술 심포지움’ 개회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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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기를 일제의 강압이 강한 곳일수록 3·1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아니다”고 반박했다. 그는 “일제가 모든 지역을 장악할 수 없었고 시골 등에는 여전히 자율성이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시골 곳곳에서 대형 3·1운동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경남 합천은 산골 지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만 3000명이라는 큰 군중이 모여 시위를 진행했다”면서 “외국 농민 봉기 사례에도 보면 감시받는 노동자 상태에서는 저항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제의 감시가 느슨한 시골 향촌공동체가 큰 규모의 3·1운동을 조직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을 영어로 하면 ‘March First Movement’ 입니다. March는 봄이라는 의미 외에 ‘전진하다, 행진하다’는 의미도 있죠. 즉 3·1운동은 ‘1등 가기 운동’인 거죠. 만약 2일, 또는 3일에 일어났다면 2등, 3등가기 운동이 되었겠지요. 하하.”


이정은 회장은 3·1운동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우리는 선진국 추격경제를 통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 선도국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이제 세계 1등이 되어 세계의 표준을 제시하고 세계를 선도해야하게 되었다. 3·1운동은 100년 뒤 지금 우리에게 ‘너희들은 세계 1등 가기를 해야 한다’고 방향제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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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March First Way’를 설명했다. 자발적으로 창안하고 연대하고 협력한 ‘3·1운동 방식’을 말한다. 이 회장은 “당시 3·1운동은 영웅이 있어서 ‘나를 따르라’라는 운동이 아니었다.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발적인 참여, 책임 의식, 수평적 토론과 연대, 협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21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이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면서 “하지만 21세기가 되면서 구성원들의 창조성을 끌어내는 수평적 토론 문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바로 100년 전 3·1운동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3·1운동은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 가져올 수 있는 폭발적 결과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3·1운동처럼 수평적 연대와 활발한 토론으로 일해 간다면 폭발적인 시너지를 이뤄내 세계 1등 나라가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충분히 했으니 지금의 우리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야 겨우 보여요”

이정은 회장은 30년이 넘도록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오고 있다. 사실 그의 전공 선택에 대한이야기를 들으면 꽤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에 스물 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학했다. 군대 제대하고 직장생활 하다 선택한 결정이었다.


“원래 국사보다 일반사회, 지리, 세계사 등을 더 잘했죠. 그런데 전공 선택을 하는데 학과 소개란에 보니까 ‘역사를 배우면 통찰력이 생긴다’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선택했었죠.”


그가 말하는 ‘통찰력’. 하지만 통찰력은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30년이 지나니까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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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1일 서울 남산 3·1운동기념탑 앞에서 열린 북한동포를 위한 3·1절 기념식


그런 그가 회장으로 있는 ㈔3·1운동기념사업회는 3·1운동과 관련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북한 동포를 위한 3·1절 행사를 유일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북한 동포야말로 3·1운동이 필요하다. 3·1운동은 100년 전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독립의 빛을 주었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자유의 빛을 보게 하면 좋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작년의 경우 행사 전날 모두 24시간 금식을 하면서 한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했다. 준비한 마음을 담아 월남세대 중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 달력에는 3월 1일이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우리의 3·1운동 정신이 북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에는 3·1운동과 관련된 기억의 중심공간을 만드는 걸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장소로 서울광장을 꼽았다. “파고다공원도 있지만 서울의 가장 중심에 서울시청 앞 광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3·1’만 붙여서 ‘3·1서울광장’이라고 부르면 100년 전의 3·1운동을 기억하고 오늘날의 과제인 세계 1등 선도국가 대한민국 만들기를 다지는 중심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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