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인물 부산대학교 김기혁 명예교수 “대동여지도가 주는 메시지는 ‘국토 통합’이죠”
부산대학교 김기혁 명예교수
“대동여지도가 주는 메시지는
‘국토 통합’이죠”
글 장수경 사진 이태교
환수본 <대동여지도>를 전체 펼친 모습 (제공: 문화재청)
“교수님, 지도가 이상합니다.” 지난해 12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의 목소리.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재단에서 보내온 지도 이미지를 함께 살펴보던 김기혁 교수의 표정은 놀라면서도 담담했다.
“이 지도는 꼭 환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장자에게 허리를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 지도로 가득차게 된다. 이후 재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지도는 3월 국내로 들어온다. 바로 <동여도>를 품은 <대동여지도>였다.
3월 말, 언론공개회가 열렸다. 역시나 열기는 뜨거웠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1861년에 처음 제작·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 전국 지도첩이다. 이번에 환수된 <대동여지도>는 1864년 제작된 목판본에 가필·색칠하고 <동여도>에 기술돼 있는 지리 정보를 필사해 추가한 것이다. 즉 <동여도>와 <대동여지도>가 하나의 지도에 담긴 것이다.
<동여도>는 조선시대의 교통로·군사시설 등의 지리 정보와 1만 8000여 개에 달하는 지명이 실렸다. 이에 반해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새겨야 하는 한계로 인해 많은 지명과 주기(註記)가 생략돼 있다. 국내 소장된 50여 점의 <대동여지도> 역시 이 같은 구성이다. 그런데 환수본의 구성은 확연히 달랐다. 이에 학계는 물론 김기혁 교수도 환수본에 주목했다. “이번 환수는 <대동여지도> 연구 범위를 확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한곳에서 만나는 <대동여지도>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4월 중순,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김기혁 교수를 만났다. 그의 연구소에는 간판도, 팻말도 없었다. 입구 유리문에 연구소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이었다. 김기혁 교수는 “간판도 없는데 안에서 소리가 자꾸 나니, 사람들이 이곳을 궁금해한다”라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연구소 책상에는 고지도를 연구하기 위한 자료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도 연구를 진행한 듯 보였다. 한쪽 벽면에는 판본별로 정리된 <대동여지도>가 상자에 고이 담겨 있었다. 마치 도서관에서 오래된 고문서를 만난 듯, 연구소는 예스러운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꾸밈없이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한 연구소는 과연 ‘학자의 방’이었다.
사실 김기혁 교수의 전공은 ‘농업역사지리’다. 부산대학교 교수 시절 학과 창립 20주년을 맞아 ‘부산 연구 동향’에 대한 주제별 연구가 진행됐는데, 이때 김기혁 교수는 ‘부산 고지도’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고지도에 점점 빠져들었다. 2008년 창립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에서는 초대 회장을 맡았다. 연구학회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고지도 연구가 진행된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지명유래집> 편찬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2019년 부산대학교 교수 퇴임 이후에는 <대동여지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연구소에는 ‘대동여지도 아카이브’와 ‘한국지명사전 편찬실’이 속해 있다.
“지도의 판본들을 한곳에 모아 누구나 박물관과 도서관, 혹은 해외에 가지 않고도 지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길 원했습니다. 또 <대동여지도>의 실체를 바탕으로 관심있는 이들이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죠. 지명 연구는 지도 해석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
우리 국민에게 <대동여지도>는 잘 알려져 있다. 2016년에는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제작될 정도다. 그런데 <대동여지도>를 더욱 이해하려면 지도 역사와 제작 당시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경영을 위해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지가 편찬된다.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정비되고, 18세기에 <여지도서>를 비롯한 읍지와 군현을 그린 지도가 제작된다. 18세기 후반에는 실학자인 신경준(1712~1781)이 기존의 것을 넘어선 새로운 모습의 지도를 그려낸다.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산수고> 등 지리지가 편찬됐고, 지리의 종합을 바탕으로 1770년에 <동국여지도>가 제작된다. 당시에는 서양의 것과는 달리 동양의 전통적인 방안도법을 사용했으며, 조선 지도가 독특한 모습으로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대축척 조선 전도가 제작된다. 신경준의 지도를 바탕으로 김정호는 <청구도>를 비롯해 <대동여지도(필사본)> <동여도> 등의 지도를 제작한다. 이들이 저본(底本)이 되어 1861(철종 12)년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으로 완성됐다.
과거 지도는 소수 지배층이 독점해 왔다. 이에 국토를 상세하게 그린 목판본 지도를 만드는 것은 소수 지배층에서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누구나 지리 정보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로, 조선 사회로서는 충격으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목판본을 필사로 모사한 지도도 적지 않게 제작됐다. <대동여지도>의 수요가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동여지도>는 모두 똑같다?
오늘날 국민은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이기 때문에 모두 똑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오해한다. 이에 대해 김기혁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대동여지도>에 대한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했다.
1925년 최남선 선생에 의해 지도에 대한 지식이 처음 구성됐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 ‘古山子를 懷함(고산자를 회함)’을 수록하는데, 식민지 국토에 대해 비분강개(悲憤慷慨, 슬프고분하여 마음이 북받침)하는 내용들이 지도 설명에 그대로 투영됐다. 지도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이 만든 영인본(2/3 축소본, 원본을 사진이나 기타의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이 보급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조선사편수회 소장본(현 국사편찬위원회본)을 이용했는데 이 판본은 흑백본(비가채본)이었다.
“광복 이후 이 지도가 다시 영인본으로 보급되는데 이것이<대동여지도> 원래 모습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전적(문자나 기호 등에 의해 전달되는 기록정보)류처럼 모든 판본의 모습이 똑같다고 생각하게 됐죠. 연구자들도 똑같이 생각했고, 연구는 지도 제작 방법에 대해 중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대동여지도>는 가채본(붓으로 색을 덧입힌 것)을 기본으로 한다. 범례 채색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내용은 한점도 없다. 이를 통해 <대동여지도>가 소비자의 수요를 반영해 제작됐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지도 구성뿐만 아니라 판각 내용에서 수정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일상을 담은 <대동여지도>
그럼 과거에는 누가 <대동여지도>를 사용했을까. <대동여지도>의 특징은 조선의 고을이 이어져 그려졌다는 점이다. 즉, 고을을 넘나들며 지리 정보를 필요로 한 이들이 지도를 사용했다. 나라에서 행정구역을 개편하려는 정부 관리들, 포교를 위해 조선에 온 선교사들, 전쟁하러 온 청나라와 일본인 군인들, 동학 혁명군들, 조선의 물건을 팔러 다니는 상인들과 개항 이후 조선에 온 외국 공관 관리들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지도는 당시 사회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이에 김기혁 교수는 고지도 연구뿐 아니라 오늘날 일상 속 <대동여지도>의 활용 방안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1925년 조선고지도 전람회가 처음 열렸습니다. 이때 <대동여지도>는 전시장 진열대 안에 전시됐죠. 지도는 화석으로 보존돼서는 안 됩니다. 진열장 밖으로 걸어 나와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이들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학자들은 연구 수준을 높이고, 언론은 국민에게 높은 해석 수준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우산도(독도)에만 집착하는 모습이 아니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모습에서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대동여지도> ‘국토 통합’을 말하다
문득 궁금증이 든다. 북한에도 과연 <대동여지도>가 있을까. 김기혁 교수는 “소장하지 않는 것으로 추론된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50년대 북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대동여지도> 영인본에 대한 조사 결과, 표지가 남한에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지난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은 평양정상회담 환영 만찬에서 북한 김정일 국무위원장에게 <대동여지도>를 선물했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북한 소장의 <대동여지도>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국 지리학자로서 그는 분단된 국토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휴전선이 없는 국토를 원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일제강점기 이전의 국토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고, 21세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국토의 표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그는 국토 지도를 1/6 크기로 줄인 ‘대동여지전도와 함께하는 통일 국토 체험’을 자체 제작했다. 지도에는 백두대간과 한강, 대동강 등의 물길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한양·평양 등 전국의 모든 고을 이름이 한글로 함께 쓰여 있다. 체험 방법은 간단하다. 색연필을 이용해 백두대간과 물길, 팔도의 경계와 고을을 지도를 따라 색칠하면 된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통일된 국토를 체험해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고지도에게 다가지말고, 고지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마음이 열린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국토 통합’입니다. 고지도를 오래 보면 말하는 것이 들려요. 물소리, 바람 소리가 들리죠. 저는 우리 국토에도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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