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호 인물 파독광부에서 꿈을 캐는 교수 된 권이종 박사

2022.03.01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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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에서 꿈을 캐는 교수 된 권이종 박사 

“막장에서 제 운명이 멋지게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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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부터 3년간 독일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파독광부로 일할 당시 보호장비 등을 착용한

권이종 교수의 모습 (제공: 권이종)




2014년 12월 중순 개봉해 1426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국제시장’.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중년 아버지들이 이 영화를 보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영화 ‘국제시장’을 더 특별하게 마주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토리의 실제 인물인 권이종(82)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다. 그는 해보라대안학교 이사장, 한국파독광부협회 부회장, 파독근로자기념관 초대 관장, 한국청소년개발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파독광부 시절부터 독일에서 교육학 박사가 되고, 나눔과 봉사의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재정리한 자서전 <파독광부 꿈을 캐는 교수로>를 

작년 4월 출간했다.


글 김현진 사진 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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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파독 장면이 내 얘기

지독한 가난 벗어나고자 지원

독일 현지에서 교육학 박사 취득




권이종 교수는 전북 장수군 지리산 산골 한 오지 마을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나 굶은 날이 부지기수였던 가난한 소년으로 자랐고, 파독 광부가 돼 3년간의 광부의 일을 마치고 독일에 16년간 머무르며 교육학 박사가 된 인물이다. 곧 대한민국이 전쟁폐허로 인해 가난한 시절 막장광부로 독일에 갔으나 꿈을 캐는 교수가 돼 삶이 바뀐 인물인 것이다.


파독근로자기념관에 따르면 파독 광부로 파견된 인원은 8968명, 간호사는 1만 2000여 명으로 총 2만 1000여 명이다. 당시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대한민국 GNP(국민총생산)의 2%대에 달했다. 이것이 극심한 가난으로 보릿고개를 보내던 한국경제의 저력이 됐으며,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든든한 기반이 됐던 것이다.


권 교수는 그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자타공인 인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3년간 일한 후 독일 아헨 공대 교원대학에서 학사, 석사 및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에서 최초로 한글학교를 설립하는 등 16년간 청소년운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한국에 귀국해서도 청소년운동과 교육발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영화 <국제시장> 스토리에 담기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흘린 땀방울과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로 한강의 기적 곧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업적들을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게끔 하고 싶었던 그는 앞장서서 기념관을 추진했고, 그 결과 2013년 5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파독근로자기념관을 개관하게 된다. 그곳에서 바로 영화 <국제시장>의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스토리가 완성되는데, 영화 스텝들이 기념관에 왔다가 초대관장이었던 권 교수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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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결혼 당시 권이종 교수와 파독 간호사였던 아내 백정신씨 모습. 

둘의 결혼 소식은 현지 지역신문에도 실릴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제공: 권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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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포스터.

영화 속 파독 광부의 모습은 권이종 교수의 실제 스토리다.



스텝들이 그에게 “영화에 파독광부 이야기를 넣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에 권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막장 광부 교수다 되다>라는 책을 참고하라고 건네주게 된다.


영화 스텝들이 그의 자서전을 참고로 해서 영화 속에 파독광부의 삶이 생생하게 재연된 것이다. 영화 속 덕수(황정민 역)와 영자(김윤진 역)가 머나먼 타국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것처럼 권 교수의 아내가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약간 과장된 것도 있지만 그의 독일 파독광부 시절을 중심으로 영화 내용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집이 가난해 중·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 냈기에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어 농사를 지내며 평범하게 살았다.


가난 벗어나게 되는 운명의 순간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에게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파독광부 모집광고를 알게 된 것.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었던 그에게 서울에 있는 오촌 여조카가 “서울 공사판에서 사람을 많이 뽑는다고 올라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농사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상경해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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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안의 막장 채탄 기계 모습 (제공: 권이종)



그 현장에서 알게 된 동료가 한양대 공대생이었는데, ‘파독광부 모집’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함께 독일에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파독광부는 1963년 12월 1진이 파견됐고, 그는 2진 모집에 지원했는데 수천 명이 몰렸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영화에서처럼 60㎏짜리 쌀가마니를 머리 위로 드는 장면이 나온 것처럼 당시에도 똑같았다고 한다. 기본적인 신체검사와 달리기, 모래가마니 어깨 위로 들기 등의 체력검사에 통과해야 했고, 영어·국사 과목 필기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권 교수는 이를 다 합격했으나 마지막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돈이었다. 독일까지 가는 기본준비 경비가 있어야 했는데, 그는 이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형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농사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던 그의 형은 전 재산인 소 한 마리와 보리 열다섯 가마를 팔아서 독일에 갈 경비를 대줬다. 동생을 위해 기꺼이 전 재산에 가까운 큰 비용을 대준 형이 있었기에 지금의 권 교수도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64년 10월 5일 독일로 떠나는 날 형님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꼭 많은 돈을 벌어오겠다’고 다짐하며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 도착한 순간 그는 그저 독일의 모든 모습들이 부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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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 시절 동료와 함께 찍은 모습. 맨 왼쪽이 권이종 교수 (제공: 권이종)



목숨 건 파독 막장광부의 삶

독일 탄광 안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모두가 ‘클뤽 아우프(행운을 가지고 위로 올라오라)’로 인사를 했다. 탄광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일이었고, 무사히 끝내고 올라오라는 뜻에서 행운을 비는 인사였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재연됐고, 그는 영화에서 탄광 막장광부의 일하는 장면들이 자신이 실제 일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흡사하게 잘 재연됐다고 말했다.


파독광부 수천 명 지원… 경쟁 치열

코 담배로 몸속 석탄가루 빼내

천장붕괴 사고로 죽을 뻔 해



광부의 일은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고됐다고 한다. 지하에 내려갈수록 온도가 올라가 더워서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속옷만 입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석탄가루가 코와 입에 들어가지 않게 보호하는 마스크가 있지만 더워서 쓰지 못할 정도라 숨을 쉴 때마다 석탄가루와 돌가루가 몸속 모든 곳으로 들어온다. 이를 빼내기 위해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코담배를 코로 들이마시면 콧속을 자극해 그때 석탄가루가 콧물과 함께 다시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런 행위를 매일 수차례 해야 하는 것도 탄광일과 별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들은 군대 시절 대부분 화생방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알 것이다. 군 제대할 때까지 매일 수차례 화생방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아마도 치를 떨지 않을까싶다.


광부의 일은 육체도 고됐지만 죽음까지 이르게 되는 사고도 끊이지 않아 두려운 직업이었다. 권 교수는 파독광부 시절 가스폭발, 매몰, 기계에 손가락이나 다리가 절단되는 등의 사고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천장붕괴 사고로 친한 동료까지 잃게 되면서 그 역시 언제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순간 두려움과 외로움에 맞서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도 실제 큰 사고를 당했다. 일하던 도중 머리 위에 집덩이만한 바위가 떨어지는 것까진 봤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손이 잘려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눈이 감겼다. 그대로 죽는 건가 싶어 그는 가족들의 얼굴과 고향을 떠올리며 눈이 감겼는데,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광부 전용병원에서 수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한 달간 병상에서 보내며 손을 잘라야 할까봐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뼈와 신경에 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지금도 다친 왼손은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권 교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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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로즈마리 여사와 함께 찍은 모습. 

로즈마리 여사는 3년간의 파독광부 일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권이종 교수를 붙잡아 교육학 박사가 되도록 이끌어준 이다. (제공: 권이종)




광부에서 교수가 된 사연은

그는 퇴원 후 광산에 복귀했고, 독일인 감독관이 그래도 그를 불쌍하게 봤는지 회복될 때까지 수월한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독일인 감독관은 외국인에게도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를 해줬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근로현장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고 권 교수는 말했다.


수양어머니가 귀국 직전 붙잡아

교육학 박사 되도록 이끌어줘

현지 사범대학 외국인 최초 입학


독일에서 광부 고용계약 3년이 끝나고 대다수가 귀국했고, 그도 귀국을 위해 모든 짐을 미리 고향에 보냈다. 비행기표까지 끊어서 공항까지 와서 비행기를 타려는 순간 그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수양어머니로 모셨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인 로즈마리 여사가 그를 붙잡은 것. 우연히 동료 광부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늘 다정하게 대해주자 고마움에 양어머니로 모시며 가족같이 지냈는데 그가 귀국하려고 하자 공항까지 와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던 것이다. 권 교수는 “수양어머니가 ‘광부 일만 하고 돌아가기 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냐’며 독일에서 공부하라고 붙잡으며 나를 비행기에서 끌어내렸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고마워했다.


로즈마리 여사는 3년간의 파독광부 일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권 교수를 붙잡아 교육학 박사가 되도록 이끌어준 이다. 어릴 적부터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열심히 공부한 끝에 사범대학(아헨교원대학교)에 입학했는데 해당 대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최초로 외국인 학생으로서 입학했다고 한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호텔 등에서 알바하면서 박사학위를 따냈고, 평생을 고학으로 꿈을 이뤄냈다. 독일에서 평생교육과 청소년 분야를 전공한 뒤 16년간의 생활을 끝내고 1979년 귀국한 그는 한국 교육에 접목해 국내 평생교육원과 청소년 교육환경을 바꾸는 데도 기여하고 헌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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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종 교수가 파독근로자기념관 전시실에서 이상면 이봉창의사선양회 총재(전 서울법대교수, 맨 오른쪽), 

차갑진 한스미디어테크 회장(전 KBS 시청자센터장, 오른쪽 두 번째) 등에게 전시설명을 하고 있다.



열악한 파독근로자기념관

파독근로자들은 한국경제 발전의 근간이 됐으나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졌다가 영화 <국제시장>으로 인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마련해주지 않아 아쉬움과 실망감을 토로한다.


파독근로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고국으로 돌아오면 걱정없이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국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자신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예우가 소홀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고, 큰 사고도 당했던 많은 파독 광부들은 귀국 후 곤궁한 생활을 이어간 데다 직업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지난 2020년 6월 9일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 일명 ‘파독광부간호사법’이 통과돼 작년 6월 10일부터 이를 시행할 수 있게 됐다. 법안에 담긴 기념사업으로는 ▲기념관 건립 및 각종 기념사업 ▲역사적 자료의 수집·보존·관리·전시 및 조사·연구 ▲교육 홍보 및 학술활동 ▲국제교류, 공동조

사 등 국내외 활동 ▲그밖에 사업에 부수되는 사업 등을 할 수 있도록 명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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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양재동 골목에 위치한 파독근로자기념관 지하 전시실 모습. 

권이종 교수가 파독광부로 일할 당시 사용했던 물품, 일기장,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한국파독연합회는 2013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 골목길에 4층짜리 주택을 매입한 후 개조해 파독근로자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 전시관이 있고, 2층은 세미나실, 3층은 사무실, 4층은 파독근로자들의 모임을 위한 쉼터 공간으로 이뤄져있다. 대부분 전시자료들은 권 교수가 모아온 자료가 상당하다. 


하지만 기념관은 건물 앞에 주차공간이 거의 없는 데다 지하철역과 거리도 멀어 접근성이 떨어져 일반인들이 쉽게 찾기 어려운 위치다. 이에 한국파독연합회 회원들은 법안에 따라 더 큰 부지와 장소에 기념관과 유스호스텔, 기념탑이 세워져 파독근로자들의 업적과 땀방울의 이야기들이 소중한 역사로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고 있다.


“파독근로자 국가유공자 준하는 경비보조 원해”

2만 1천여 명의 파독근로자 중 국내에는 2/3 정도가 거주 중이고, 나머지 1/3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이제 정년퇴임하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말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고국에 왔을 때 편히 쉴 수 있는 유스호스텔과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관과 기념탑 등이 있는 공원으로 공간이 만들어지길 희망하고 있다. 또한 기념사업과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도 많아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경비보조를 원하고 있다.


이를 실행시키기 위해 권 교수는 한국파독연합회 이사장으로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정부 관계자 및 관련 기관장, 국회의원 등과 미팅하며 업무를 추진하고 있고, 독일대사와도 접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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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일 파독광부 58주년, 간호사·간호조무사 55주년 기념행사 및 기념사업 추진방향 세미나가 열린 모습. 

권이종 교수(가운데)를 비롯해 파독근로자 회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또 여러 언론에 홍보하며 관심을 부탁하고 있다.권 교수는 “2만 명이 넘는 이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 먼 타국에 가서 힘들게 일하면서 외화를 벌어들인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왔지만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현재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게 사는 회원들이 많다. 직업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는 이들도 있는데, 이제 법이 통과돼 국가는 실행에 옮겨야 하니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와 함께 물질적인 지원을 간곡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파독근로자 기념관 열악한 장소

후대에 알릴 기념공원 조성 필요

파독근로자 처우 개선도 강조


이어 권 교수는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룬 그 근간에 파독근로자들의 수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국민들과 세계의 모든 관광객들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이 알기로는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 파독 근로자들인데 기념공원이나 기념탑도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 곧 파독근로자들의 공로가 있음에도 아직까진 국가와 사회가 이들에게 무엇을 해줬는지 알릴 수 있는 상징적인 것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우리나라 국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관광객도 찾을 수 있는 기념탑과 기념관 등이 있는 공원이 조성됐으면 좋겠다. 특히 기념탑에는 땀흘려 국가에 헌신한 파독근로자들의 이름을 새길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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