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인물 ‘사고뭉치’ 소년 영화 꿈 키우다
‘사고뭉치’ 소년
영화 꿈 키우다
글·사진 장수경 사진제공 이귀덕 영화감독, 한국문화예술산업진흥회 사무총장
‘철컹 철컹 철컹’. 만석인 상태로 달리는 퇴근길 지하철 안.
매일 이곳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몇이나 되는 걸까.
핸드폰을 만지거나, 책을 보는 사람. 동료와 이야기하며 깔깔 웃는 사람,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사람.
가지각색의 사람들의 표정은
이귀덕(47) 영화감독(한국문화예술산업진흥회 사무총장)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렌즈만 돌아가지 않을 뿐 영화 속 한 장면과 다름없었다.
그러다 지하철이 다리 위를 지나가면 석양빛이 물든 한강이
창문으로 길게 내려다보이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피곤함이 절로 날아갔다.
그럴 때면 이 감독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설레는 감정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아냈다.
그의 감성은 오늘도 그렇게 충전된다.
1. 이귀덕 감독이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민들의 이야기 담고 싶어
사랑과 희망 느꼈으면…
현장에 있어야 ‘감독’이다
‘조금씩 천천히’ 희망 담다
이 감독에게 일상은 배움 그 자체다.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하는 모든 것은 그의 오감을 자극했고 영화 제작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수많은 감정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는 작품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그려내곤 했다.
2011년 영화 <향기>, 2012년 영화 <재앙의 시작>, 2015년 영화 <파랑새>, 2020년 영화 <행복한 시간>은 그의 대표 작품이다. 이 가운데 영화 <행복한 시간>은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소아암뇌종양 소녀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녀의 사랑은 눈물샘을 자극할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다.
최근에는 <시나브로>라는 영화를 찍었다. 순우리말인 시나브로는 ‘조금씩 조금씩 아주 느리게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감성을 자극하는 이 영화는 여고생부터 청춘남녀, 중년 등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이 출현한다. 빌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배우들이 담아낸 다양한 감성으로 영화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2. 영화 <시나브로>에서 101호에 살고 있는 현우와 102호 예원이의 캐릭터 스틸컷
3. 유정(고3, 딸)과 아버지의 심리를 그린 스틸컷
각박한 세상, 거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불어 닥쳐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감독은 그런 힘듦 가운데 있는 모든 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 이 감독은 “서민들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 담고 싶었다. 코로나19가 조금씩 풀리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희망과 사랑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시나브로>에서 이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취업준비생인 ‘현우’다. 빌라에 사는 현우는 ‘취업을 했다’며 거짓말로 부모님을 안심시킨다. 현우는 옆방에 사는 한 여성을 좋아 하는데, 그녀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 극중 현우를 볼 때마다 이 감독은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그가 20대 때의 자신과 닮아서다. 그가 겪은 유년시절부터 청소년기, 대학시절에 느낀 다양한 감정들은 이처럼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1. 영화 <시나브로>에서 예원이를 담당하는 민준이의 포르쉐를 다양한 컷으로 담고 있다.
“감독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
사랑의 방식, 그리고 표현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금세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서 깨닫는 경우도 있다. 영화 <시나브로>에 등장하는 여고생 자녀를 둔 아버지의 사랑도 그러했다. ‘부정(父情)’이라는 것을 청소년기의 딸이 알아차리는 건 사실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연인의 사랑만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단단하고 강한 것이 아버지의 사랑일 것이다. 극중 배우는 오늘날 이시대의 아버지들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평범해서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사랑이야기. 이 감독이 서민들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고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영화를 꿈꾸는 많은 사람은 대부분 규모가 큰 상업영화를 원한다. 그런 동료나 후배들에게 이 감독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감독은 현장에 있어야 감독이다.” 현장에 없으면 감독이 아니고 일반 대중과 똑같다는 것이다. 특히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밟아갈 때 비로소 더 큰 것을 담는 그릇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이 이치는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크건 작건 현장에서 연기를 해야 진짜 배우인 것이다.
이 감독은 “상업영화도 중요하지만 인디영화나 독립영화 쪽에서도 많은 활동이 있어야 한다”며 “앞으로 감독이 되고 싶거나 영화 제작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영화를 꾸준히 개발하고 제작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2. 유정, 서연, 하은의 캐릭터를 위해 연기 분석 설명을 해주는 이귀덕 감독과 그외 스텝진.
‘사랑’ 영화에 담다
“혹시 재래시장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들의 손을 보신 적 있으세요?” 이 감독의 갑작스러운 질문. 재래시장에 갈 때 기자의 시선이 궁금했나보다. 삶 자체가 공부인 그는 상인들의 얼굴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자연스레 눈에 담고 있었다. 재래시장이 그의 어린 시절의 향수가 담긴 공간이기도 해서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농부 자녀로 태어난 이 감독. 집이 시골에 있어서 늘 10리를 걸어 학교에 오갔다. 철이 되면 어머니는 직접 기르신 채소를 시장에서 팔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추억이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그래서일까. 시장에서 채소 파는 어르신들이 남같지 않았다. 그런 어린 시절의 향수는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내렸다.
‘가족’이라는 테마는 그가 좋아하는 단골소재다. 가족의 사랑을 영화를 통해서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서였다. 세 살의 나이로 뇌성마비 후유장해가 있던 이 감독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졌다. 부모님은 가정을 책임져야하기에 늘 바빴다. 그래서였는지, 늘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다. 자연스레 부모님의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나아가 연인에 대한 사랑은 작품에 녹아내려졌다.
이 감독은 “영화 <재앙의 시작>에서 주는 메시지도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혼하면 자식에게 불행과 큰 재앙이 온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며 “영화 <파랑새>도 학교 내의 따돌림을 소재로 했지만 그 안에는 부모의 따듯한 사랑, 친구의 사랑이 잘 담겼다”고 설명했다. 2014년 웹영화인 <못생긴발>도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다뤘고, <시나브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사랑, 연인의 사랑을 담아냈다. ‘사랑’. 그건 이 감독에게는 뺄 수 없는 단어였다.
1. 영화 <시나브로> 회상씬. 과거 유정이의 아버지와 집나간 은정(어머니)이 싸우는 장면.
영화의 길, 결코 우연 아냐
청소년 시절 그는 꽤나 사고뭉치였다. 어릴 때 시골에 살다가 9살 무렵, 서울 학교로 전학을 왔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고 사투리를 써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태권도를 배웠고, 잠시 비행청소년의 길도 걸었다. 그러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중학생 때 친구를 따라 CF촬영장에 가면서였다. ‘찰칵찰칵’. 카메라 렌즈 소리는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촬영장의 느낌이 너무 좋았고,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촬영을 해야겠구
나.’ 자연스레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서울 대학로에 자주 갔다. 그 당시 주말마다 ‘시나위’ ‘부활’ 등 가수들의 무료 콘서트가 대학로에서 있었는데 그때 사진을 찍고 현상해서 가져다줬다. 그게 너무나 기뻤다.
대학교는 방송연예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시절 영화사에 막내 조감독으로 알바를 하기도 했다. 또 어린 나이에 KBS 드라마 제작국의 PD로 일할 기회도 얻었다. 방송국 퇴사 후에는 외주제작을 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2013년에는 복지TV 제작국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산업진흥회’라는 민간단체의 사무총장을 역임
하면서 예술교육과 공연·연극·영화 제작을 하고 있다.
2. 분주하게 움직이는 촬영팀의 밤샘촬영 컷
모두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 메시지 주고파
영화란, 인생·사랑·아픔이다
‘예술교육’은 전국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스토리텔링’이다. 첫 시작은 포천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였다. 당시에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동산에 가서 핸드폰으로 사진과 영상 찍는 방법을 알려줬다. 편집은 그룹별로 했다. 수업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제작 과정은 물론 결과물까지 만족스러워했다. 이 감독은 “시설에 계신 분들이 장애가 있지만, 충분히 능력이 다 되시는 분들이다”라며 “저 또한 장애가 있다. 그럼에도 강연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모두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강연을 통해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향후 이 감독은 아픔을 가진 분들, 상처로 인해 과거의 시간에 멈추신 분들의 아픈 기억을 달래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또 30~40대 분들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영화를 다루고 싶다고 전했다. 내년부터는 후배들 양성 교육에도 치중할 계획이다.
“저에게 영화란 인생이고 사랑이고 아픔입니다.”
그는 보통 영화 제작 과정에서 ‘이런 감정으로 연출해야지’하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결과물을 보면 늘 놀라워했다. 그건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 그래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일상의 행복이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소중함의 가치를 이 감독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일깨워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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