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호 인물 서예가 원당(原塘) 이영철 박사 “서예는 하나의 문화다”

2023.06.22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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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원당(原塘) 이영철 박사

“서예는 하나의 문화다”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서예는 그저 손으로 쓰는 재주가 아닙니다. 기능은 일부일 뿐, 인문학의 토대 위에 금석학 등이 함께할 때 비로소 표출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서예를 ‘문화’로 보는 이유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서예가이자 금석학자, 전각의 명인으로 잘 알려진 원당(原塘) 이영철 박사. 그는 비록 서예, 금석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언젠가 서예와 금석학 등 인문학의 붐(boom, 대유행)이 다시 일 것이라고 말한다.


유난히 볕이 좋았던 3월의 어느 봄날, 이영철 박사가 주임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를 찾았다. 이곳은 그가 올 2월까지 제5대 총장으로 시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꽤 걸어 올라가니 조금은 낯선 느낌의 학교가 눈앞에 펼쳐졌다.

태고종 총무원청사로 사용되던 서울 성북동 중앙불교회관 건물 및 부지에 세워진 덕에 흔히 생각하는 학교 건물들과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인가. 건물 사이사이에 핀꽃들과 고즈넉한 정경(情景)이 학교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행길이기도 하고 독특한 외관과 구조로 연구실을 찾지 못하자 직접 건물 앞까지 마중 나온 이영철 박사의 첫 느낌은 ‘예술 하는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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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부터 올 2월까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제5대 총장을 지낸 이영철 박사가 작품집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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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 원류 찾아 중국 유학길 올라

이영철 박사에게 서예는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학문이자 예술이었다. 전남 고흥에서 서당을 하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한학과 서예를 가까이하며 지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서예라는 ‘문화’와 함께 성장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한학을 하셨어요. 어릴 때는 한자의 뜻은 잘 몰라도 입으로는 줄줄 외웠죠. 외울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곶감을 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어요. 사실 곶감 먹고 싶어서 외웠던 거죠.”


혹 누구에게 어떤 계기로 한문을 배웠느냐고 묻는다면 “내 선생님은 곶감”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계속되는 인터뷰 속 무겁고 어려운 주제에도 적재적소에 재치 있는 답변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가히 말솜씨까지 겸비한 그다.


서당에서 공부하며 붓으로 글씨를 쓰다 보니 서예 또한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렇게 삶 속에 자연스럽게, 어쩌면 당연하게 스며든 한학과 서예는 훗날 그를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만드는 발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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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박사는 서예의 원류를 찾기 위해 중국과 수교 전 중국 베이징대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 그를 시대는 가만두지 않았다. 유신정권 시절 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군대에 끌려간 그는 제대 후에도 복학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취직할 수 있는 길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민주화의 과정에는 많은 아픔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대학 진학의 길이 열리자 그는 부산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졸업하게 된다.


군 제대 후 시대적·사회적으로 어둡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그는 서예의 대가 여초 김응현 선생님 등을 찾아다니며, 서예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일에 매진했다.


“서예라면 자신 있었는데 서예의 대가들을 만나 보니 저는 조족지혈이었던 것을 느꼈죠. 배우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서예의 원류를 찾아 중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길로 중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 그는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인 1992년 어렵사리 중국 베이징대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유학길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8월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막상 중국에 와보니 전공과에 서예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인접한 학문인 고문자학(금석문)을 전공하게 됐죠.”


베이징대에서 고문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1998년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서예, 부호의 누적에서 시작

‘서예’ ‘금석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한편으로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예의 시원을 어디서부터 봐야 할까. 이 물음에 이영철 박사는 “부호(符號)의 누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소리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호’가 만들어졌어요. 이런 맥락에서 전각의 시원도 신석기 말기로 볼 수 있죠.”


중국의 상나라(BC 1600~1046) 때 점을 치는 일에 사용했던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를 갑골문자(甲骨文字)라고 한다. 점을 친 후 중요한 내용을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어깨뼈에 새긴 것으로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갑골문을 서예와 전각의 시원으로 보더라도 그 역사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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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扇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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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高山而望四海(등고산이망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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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百壽百福> 작품. 오른쪽) 青春易去未功遂 耳順漸來思體殘(自作詩, 35×137×2)


“제정일치 사회였던 청동기 시대에 가장 큰 행사는 단연 제사였어요. 단순히 점괘를 보고 새기는 것이 아닌 하늘신, 땅신, 조상신에게 보고를 올리는 개념이었죠. 그러니 더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새기려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미적 감정의 발로가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 서예는 문자의 발전 즉 부호의 누적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중국의 주나라는 중원을 장악한 뒤 은나라의 갑골문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후 글꼴을 거북이의 등껍질이나 소의 넓적다리에 새기지 않고 청동기에 새기기 시작했다. 바로 ‘청동기문자’다.


청동기문자는 은나라 때도 있었지만 은나라 때의 청동기문자는 주로 소수 부족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한 것에 불과했고 글꼴의 상형성 또한 짙었던 반면 주나라는 글꼴을 과감하게 부호화하고 청동 죽을 진흙 틀에 부어 글꼴을 만들었다. 청동기문자의 학술 명칭이 ‘금문(金文)’이다. 해서 이때를 금문시대(金文時代)라 한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상이나 그릇 등을 각 집에서 빌려올 때가 많았어요. 나중에 돌려주려고 보면 그 뒷면에 합천댁, 함안댁 같은 택호(宅號)가 써있는 경우를 볼 수 있었는데 신석기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족휘(族徽)’라는 것이 있었어요. 씨족이나 부족을 상징하는 문자라고 할 수 있죠.”


원당 이영철 박사의 말처럼 과연 서예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바탕이 돼야 그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서예는 인류가 부호를 만들어내고 문자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화로 항상 함께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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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문자 만 개를 향해서

서예부터 전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는 이영철 박사. 현재는 종교나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는 ‘도상(圖像)문자’를 주로 작업 중에 있다고 한다.

“간단하게 표현한 도상문자 만 개를 목표로 작업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작품의 성격상 불상이나 호랑이처럼 불교에 관련된 도상이 많죠.”


그는 인도 범어를 표현한 작품, 불경을 한글로 쓴 작품, 청동기에 슈림프(shrimp, 새우)라는 영어 단어를 형상화한 작품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슈림프 작품은 전시회 때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한 캐나다인에 의해 지금은 캐나다에 가 있다. 좋은 작품을 바라보는 눈은 인종도 국경도 초월하는 법이다.


작품 활동 중에도 그는 학교에서 문화예술콘텐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올 2월까지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활동하며 학교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 결과 2019년 국제화인증대학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고,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을 받게 되면서 재원확보에도 기여했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서예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는 국내 학생은 14~15명 정도 된다. 20~30명에 달하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이곳에서 서예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과거 베이징대에 유학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서예의 원류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던 그가 이제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예를 사랑했고, 함께했으며 독학으로 전각을 배워 이제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인 도상문자를 만들고 있는 원당 이영철 박사. 그는 대한민국의 서예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제식 교육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질이나 소양이 글씨에 나타나요. 이것을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해요.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는 의미죠. 글씨 하나에서도 성정(性情)을 읽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더이상 기교적인 의미에서 서예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봐요. 언젠가 서예의 붐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서예는 문화이기 때문이죠. 문화는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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