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인물 김영준 나전칠기·옻칠 작가 나전칠기 속에 깃든 빛, 세상에 치유를 건네다

2024.11.07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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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나전칠기·옻칠 작가

나전칠기 속에 깃든 빛,

세상에 치유를 건네다


글·사진 장수경


그날, 그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10년 넘게 쌓아온 증권맨의 삶과 명성은 한순간 끝이 났다. 그가 남긴 건 차가운 숫자들뿐이었다. 이제 그의 앞에 있는 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찾겠다는 갈망이었다. 그의 시선은 오래된 자개의 빛을 향했다. 그 빛은 단순한 반짝임이 아니었다. 그건 삶의 혼란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비추는 등대였다. 그는 그 빛을 좇아 인생을 새롭게 정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을 다시 마주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예술의 길’로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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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자개 속에서 태어난 새 생명

전통을 바탕으로 자개를 현대 예술로 승화시키는 여백(如白) 김영준 작가를 양평 나전칠기미술관에서 만났다. 김영준 작가는 단순한 공예를 넘어 나전칠기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가는 예술가다.


김영준 작가가 처음부터 예술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였지만, 가정 형편이 그의 꿈을 지지하지 못했다. 경제적 안정을 위해 증권회사에 입사했고, 사회는 그에게 성공을 안겨줬다. 그러나 그 성공은 일시적이었다. 매일 수익을 쫓으며 일을 하던 그의 내면은 점점 공허해졌다. “돈은 있었지만, 진정한 가치는 찾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친구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김영준 작가의 미적 감각을 알고 있던 친구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디자인 업무를 맡겼고, 그 과정에서 그는 나전칠기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노하우를 익혀나갔다. 그러던 중 오래전 어머니의 자개 장롱이 그의 기억속에서 떠올랐다. 빛바랜 조개껍데기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영롱한 빛.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안에 담긴 빛은 그의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


그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버리던 자개의 빛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 빛을 자신의 길로 삼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자개장롱이 버려지던 시기였어요. 아파트 문화가 자리 잡으며 자개의 빛도 점점 사라졌죠. 하지만 저는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평소 ‘남들이 가는 길 반대편에 꽃길이 있다’고 믿어왔기에,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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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작가가 나전칠기의 매력인 ‘빛’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영준 작가는 전문적인 디자인 지식을 쌓기 위해 미국 LA디자인아트센터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나전칠기 가게를 열었지만 사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잠시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2005년, 그는 가구 제작에서 벗어나 예술품 제작으로 전환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2년간 디자인을 공부하며 역량을 쌓았고, 일본 가나자와 대학교에서 옻칠과 정제 기술을 배우며 예술적 기초를 더욱 다졌다.


빛의 예술가, 자개의 매력에 빠져

김영준 작가가 말하는 나전칠기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빛’이다. 자개가 내뿜는 빛은 단순한 반짝임을 넘어서, 각도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색과 느낌이 변화한다. 이 빛은 신비로운 에너지를 품고 있어, 김영준 작가는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자연이 연결되는 순간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자개는 그 빛을 담고 있고,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전칠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김영준 작가는 나전칠기 작업을 통해 버려진 자재에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진심으로 즐긴다. 그의 손끝에서 전복 껍데기, 조개, 소라 같은 자연의 부산물들이 다시 태어나 영롱한 빛을 발한다. 이 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으면서도, 바라볼 때마다 새롭고 다르게 다가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단순히 장식적인 작업에 그치지 않고, 나전칠기의 빛을 통해 세상에 희망과 영감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의 나전칠기 예술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삶의 복잡한 감정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이다. 그 속에서 빛이 가진 치유와 변화의 힘을 전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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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한 빛

김영준 작가는 여러 해외 전시에 참여하며 작품을 선보였지만, 초기에는 판매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07년 열린 파리 전시회가 그의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전시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그의 작품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초충도’와 ‘코스모스’ 등 여러 작품을 구매했고, 이를 계기로 김영준 작가의 나전 칠기가 세계무대에게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8년, 빌 게이츠에게 콘솔 게임기 ‘엑스박스(X-BOX)’에 자개를 새겨 넣어달라는 특별한 요청을 받는다. 플라스틱과 곡면으로 이뤄진 엑스박스에 자개를 붙이는 작업은 기술적으로 까다로웠지만, 김영준 작가는 이를 극복했다. 매화와 나비 등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아내며 이 엑스박스는 단순한 게임기를 넘어 전통 공예와 현대 기술의 융합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빌게이츠는 이 엑스박스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예방하며 선물한다.


이후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아이폰 케이스에 자개를 새겨 넣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세계적인 명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점차 국제적인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한 2014년 8월 김영준 작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에 맞춰 특별한 의자를 제작했다. 의자는 전체를 검정 옻칠로 마감하고, 등받이에는 교황 문양을, 손잡이에는 자개 장식을 더해 간결하고 소박한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화려함 대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교황의 겸손한 성품을 잘 담아냈다. 의자는 교황 측의 공식 선택을 받아 행사에 사용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김영준 작가의 작품은 전통 공예와 영성의 조화로 또 한 번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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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게이츠 엑스박스(X-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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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자개 아이폰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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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의자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김영준 작가는 자개가 가진 빛의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그는 “처음엔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빌 게이츠 같은 해외 명사들이 나전칠기의 매력을 알아봐 주면서 국내 반응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전칠기는 이제 단순히 전통 공예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김영준 작가는 자개의 고유한 빛을 현대적 감각과 융합해 새로운 예술의 차원을 만들어냈고, 그의 작업은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조화를 담아내며 나전칠기의 정교한 기술과 자개 특유의 신비로운 빛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고비를 넘긴 도전의 시간

예술가로서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김영준 작가는 작업을 하며 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고혈압, 당뇨 등 여러 건강 문제들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특히 교황 의자 제작을 주선했던 홍문택 신부가 세상을 떠나며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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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전주에 있는 한 신부님에게서 배운 자연 치유법이 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약 없이도 회복된 경험은 그에게 신체와 마음 근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더 큰 성찰에 도달하게 됐다. 그의 삶은 마치 신이 그를 어떤 목적을 위해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그의 내면은 예술가로서 한층 더 깊어지고 있었다.


한계를 넘는 여정, 빛의 매개체

이제 김영준 작가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물질적 성공보다는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며 작품을 통해 더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한다. “앞으로의 30년은 또 다른 도전입니다. 이제는 빛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빛이 사람들에게 치유와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제 역할을 다하는 거죠.”


김영준 작가에게 나전칠기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성찰과 나눔의 상징이며, 그는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에게 나전칠기의 기술을 전수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한국의 빛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바람은 단순한 기술 전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나전칠기를 통해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함께 전해주고 싶어했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항상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그의 삶의 본질이며, 그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열망이 담긴 빛의 매개체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자개는 단순히 빛을 반사하는 것을 넘어, 세상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통로가 된다. 그가 신의 이끌림 속에서 만들어나갈 무언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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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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